인어공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등 서양 고전을 손으로 그려낸 2D 셀 애니메이션의 독보적 존재였던 디즈니는 90년대 후반부터 2D 3D를 넘나드는 CG 애니메이션의 기술력과 작품성을 겸비한 픽사, 드림웍스의 성장에 21세기부터는 전통적인 독점 지위를 내려놓게 된다.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으로서 글로벌한 파급효과를 가능케 한 미국의 3대 제작 스튜디오와,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트렌드에 구애 받지 않는 독자적 포지션을 구축한 일본의 지브리를 가리켜 현재는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 스튜디오라 부르고 있다. 이 가운데 2010년에 개봉되었던 드림웍스 제작 '드래곤 길들이기(How to train your dragon)'는 영화의 연출을 차치하고서라도 음악의 작품성만으로 충분히 애니메이션 음악 역사의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월드뮤직의 붐이 1990년대 영화음악의 패러다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데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했던, 한스 짐머와 엘튼 존이 합작한 라이언 킹(The Lion Kong, 1994) 사운드트랙에 가히 비견될 만하다.



파월레스크의 대중성을 넘어 심도 있는 음악성에 도전

 

영국 출신 영화음악가이자 '리모트 컨트롤Remote Control' 짐머 사단의 구성원으로 잘 알려진 존 파월John Powell은 바이킹을 소재로 켈틱Celtic 음악의 정서를 궁극의 아름다움으로 녹여낸 음악 스코어를 세상에 선보였다. 2011년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던 <드래곤 길들이기>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적지 않은 미국인 및 영화음악가들이 2000년대 최고의 명작으로 꼽는 정통적인 스코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해리 그렉슨-윌리엄스Harry Gregson-Williams와의 공동 작업 체제에서 벗어나,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 2007> 스코어링을 통해 퍼커시브 베이스 신스percussive bass synth를 미니멀한 스피카토 연주에 접목시키며 자신만의 본격적인 스릴러 '보이스'를 구축한 존 파월은, 짐머레스크Zimmeresque(8비트 스피카토의 레이어로 겹겹이 쌓은 스트링에 펀치감 강한 퍼커션을 입혀 호모포니 형태로 만드는 전형적인 짐머 스타일의 음악)의 경우처럼 단순한 악기 편성으로도 손쉽게 효과를 극대화하는 특성으로 인해 많은 차세대 작곡가들이 유사한 스타일로 그것을 차용하게 되는 대중성을 낳은 바 있다. 그의 스릴러 스코어링 스타일을 가리켜 영화음악가들 사이에서는 별도로 '파월레스크Powellesque'라는 이름을 사용해 오고 있다.

 

동료 작곡가와 비교해 보았을 때 그가 구사해 왔던 파월레스크는 함께 일해 온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반복적인 펀치의 거친 질감을 강조하는 한스 짐머, 하모니 및 사운드 이펙트의 유려함을 강조하는 해리 그렉슨-윌리엄스의 음악 컬러를 일면 동시에 반영하는 측면이 있었다. , 전형적으로 짐머가 단순 투박, 그렉슨-윌리엄스가 복잡 섬세라 묘사한다면 파월은 이를테면 단순 섬세인 것이다. 때문에 파월레스크를 가리켜 짐머레스크의 라이트 버전으로 인식하는 견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파월이 결심한 도전은 파월레스크를 완전히 배제한 채 '드래곤 길들이기'라는 바이킹 애니메이션에 특화된 화려한 어드벤처 음악을 쓰는 것이었다. 단 적당히 화려한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가열하게 눈부실 정도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로맨틱한 에너지가 넘쳐서 두고두고 회자될 수 있는 수준의 음악을 목표로 했다. 이에 따라, 그의 크레딧이 담긴 2010년 개봉 영화 중 <그린 존Green Zone>에서는 자신의 기존 스릴러풍 음악 스타일인 파월레스크가, '드래곤 길들이기'에서는 그동안의 애니메이션 음악 작업의 노하우와 새로운 도전의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준 형태의 음악이 별도로 나타나게 된다.



Track 1. "This is Berk (Main Theme)"


춤추는 셔플 위, 억센 당김음을 수놓는 틴 휘슬과 오케스트라 튜티가 만나는 쾌감


일반적으로 배우가 직접 출연하여 실사를 촬영하는 영화와 달리, 애니메이션 영화는 연출되는 장면들의 전환이 더 잦고 풍부한 색채를 적극적으로 고루 활용하기 때문에 세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하모니, 전조 등의 측면에서 작곡의 자유도가 더 높다. 음악 자체의 등장 빈도도 더 높은 편이다. 높은 빈도만큼 적극적으로 스토리텔링에 관여하므로, 다큐멘터리의 인터뷰나 나레이션 밑으로 깔리는 언더스코어underscore 혹은 일반적 영화음악에 비해 음악가의 프로듀서적인 역량이 보다 전면에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편곡과 사운드 측면에서 영화음악이 장면 묘사의 전체적 질감과 현장감을 중요시하는 데 반해, 애니메이션 영화 스코어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채로운 악기 편성 및 악기 연주의 기교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여 관객의 상상력을 북돋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위의 링크는 <드래곤 길들이기> O.S.T의 메인 테마에 해당하는 트랙으로, 영화의 가장 도입부를 위한 서곡 이후에 메인 프레이즈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12/8박자의 셔플이라 트리플 미터triple meter(3)가 셈여림을 이끄는데, 우드윈드, 스트링, 브라스가 일체적으로 옥타브 유니즌으로 전합주tutti하면서 이때의 스타카토 멜로디가 리듬 파트의 역할까지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 이에 따라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메인 프레이즈의 멜로디는 매우 강한 각인 효과를 지닌다. 프레이즈의 리듬에서 보이는 당김음syncopation이 가미된 트리플 미터는 아이리시 전통 음악의 변주에서 발견되는 특징으로, 보통은 피들fiddle 역할을 담당하는 바이올린이 6연음 패턴의 멜로디를 연주하고 틴 휘슬Tin Whistle(아이리시 휘슬이라고도 부름)과 함께 연주하지만, 본 트랙에서는 틴 휘슬의 존재는 부각시키되 60인조 이상의 헐리우드식 오케스트라 편곡에 좀 더 맞추어 피들에 해당하는 부분은 후반부 바이올린 6연음 아르페지오 반주로 할애한 모습이다. 덧붙여 저역대의 남성 콰이어는 극중 등장하는 바이킹의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필수적인 악기 중 하나였을 테다.

 

곡의 후반부에는 전조를 거쳐가며 12/8박자의 빠른 호흡이 3/4박자로 느슨해지는데, 마이너 스케일의 1(토닉의 화성적 느낌은 역동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배제)를 기점으로 리듬과 멜로디를 강조하던 켈틱(Celtic) 컬러가 메이저 스케일 진행을 만나면서 화성적으로도 헐리우드 어드벤처 음악의 다채로운 형상으로 체화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잘 기획된 퓨전 스타일의 구조 위에서 쓰여진 메인 프레이즈의 튠이 무엇보다 기억에 강렬히 남을 만한 훅이기에, 자신감 있게 다른 연결 고리들을 유기적으로 확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전통 악기를 등장시키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닌, 아이리시 전통 음악의 본질을 가져가면서 헐리우드식 오케스트레이션으로 그를 체화한 매우 능수능란한 퓨전 스코어라 할 수 있다.



Track 23. "Coming Back Around (End Theme)"



파이프 밴드가 오케스트라에 녹아 들며 장식한 축제 분위기 속 그랜드 피날레


<드래곤 길들이기> O.S.T에는 크게 두 가지의 메인 프레이즈가 다양한 형태의 변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첫 메인 프레이즈를 대표적으로 활용한 메인 테마에서 틴 휘슬이 메인 테마의 컬러를 채색하며 전체 스코어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면 다분히 헐리우드의 작법을 따르는 후자의 메인 프레이즈에서 쓰인 대단원의 마무리는 아이리시 워파이프great Irish warpipes가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 아이리시 워파이프는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방의 파이프와 모양이 흡사한 백파이프의 한 계통으로서, 대표적인 백파이프에는 아일랜드의 국가적인 악기이자 <브레이브하트Braveheart>(1995)의 테마에 사용되며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런 파이프uilleann pipes가 있다. 사실 워파이프는 아일랜드에서 중세 때부터 전쟁 시에 연주된 역사상 최초의 백파이프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정치적인 이유로 워파이프를 금지시킴으로써 대체 악기인 일런 파이프에 밀려 자칫 잊혀질 뻔했던 악기다.





두 백파이프는 연주를 얼핏 들으면 비슷한 음색으로 들리지만 사실 차이점은 존재한다. 정적으로 앉아서 손의 운지와 떨림을 이용해 연주하는 일런 파이프가 해금을 연상케 하는 우는 음색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면, 서서 혹은 이동하며 동적으로 손의 운지와 입을 함께 사용하여 연주하는 워파이프는 일런 파이프에 비해 좀 더 뮤트가 걸린 듯한 쌉쌀한 음색을 들려준다. 때문에 일런 파이프는 솔로나 챔버 앙상블에서 서정적이지만 목가적이고 명상적인 컬러를 채색할 때 활용되는 경우가 많고, 워파이프는 파이프 밴드pipe band와 같은 체제에서 여러 대의 워파이프와 밀리터리 스네어military snare의 합주로 행사와 축제 음악 등에 활용되곤 한다.

 

어쩌면 가까운 영국의 음악가이기에 바이킹 음악 스코어링을 위해 더욱 관심을 가졌을 틴 휘슬과 아이리시 워파이프는 켈틱 음악을 떠올릴 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악기들로, 그 음색만으로 독립적인 세계를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음색의 이미지는 강하다. 음색의 개성이 강한 악기가 오케스트라에 잘 녹아 들기 위해서는 개성이 강한 악기들이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가 많은 양보를 해 주어야 전체가 더 살아나게 된다. 위의 링크에서 흐르는 O.S.T의 마지막 트랙은 워파이프가 등장하는 섹션에서 오케스트라가 반주 파트로 빠지거나 완전히 사라지면서 워파이프에 집중도를 확실히 몰아 주어 단발적인 몇 차례 등장에도 불구 악기에 대한 강한 음색의 이미지를 전체에 스며들게 했다. 후반부 롤rolls이 적극적으로 포함된 밀리터리 스내어가 풀 오케스트라의 리듬을 마치march로 연주하며 화려한 축제 분위기의 엔딩으로 치닫는 광경은 이 트랙의 압권이다. 다시는 이 이상 음악을 만들 수 없을 것처럼 투철하고 가열하게 쏟아낸 '드래곤 길들이기' O.S.T는 존 파월 본인에게도, 리스너에게도 오래도록 회자될 걸작 튠으로 남을 것 같다.

 

존 파월은 스핏파이어 오디오Spitfire Audio사와의 독점 인터뷰에서 젊은 차세대 작곡가들이 자신만의 보이스를 갖기 위해서는 오직 그 자신만큼은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음악적 집착musical fetishes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매우 진중하게 자신의 음악을 쓸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Take the opportunity to write music VERY seriously이다.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기보다 정상, 비정상으로 단정짓길 어쩌면 더 원하는 한국의 현 문화 인식 속에서 존 파월이 말한 철저한 자기 자신의 음악적 집착에 대한 고군분투의 경험을 끝까지 치뤄 낼 차세대 뮤지션들이 많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아직도 요원하고 비현실적인 소망인지 모른다. 필자의 열망이 담긴 글이 아무쪼록 조금이나마 수면 아래 어딘가에서 노력하며 꿈을 꾸는 그들에게 일말의 자양분과 따뜻한 격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송윤규@surinmusic@gmail.com


※ 외부 필자의 컬럼은 본 블로그의 논조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목소리의 울림 가운데 많은 이들의 음악생활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