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의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올해의 영화를 꼽으라면 바로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를 꼽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O.S.T.가 지닌 의미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연말결산이 아닐까 싶다. 특히 한국에서 음악으로도 그렇다고 영화로도 완연한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영화음악'이 어떤 식으로 정체성을 찾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글로벌한 흐름을 주시해보는 것이 중요한 키가 될 수 있다.

새로이 참여한 송윤규 필자는 헐리우드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영화음악, 음악감독, 프로듀싱 등의 작업을 하다 귀국했다. 그가 이러한 글로벌한 호흡과 경험을 살려 '톤 오브 에이지'에서 영화 사운드트랙에 대해 깊이 탐침(probe)을 삽입하는 장면을 선보인다.| TONE OF AGES


2. "Debris"

전혀 새로운 방식의, 가공할 만한 프로그레시브 스코어



영화음악은 성격에 따라 크게 2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을 크게 드러내기보다 비디오의 장면(footages)의 분위기의 시퀀스를 적절히 살려주는 맞춤형(passive) 음악, 다른 하나는 음악이 영상에 대한 중요한 스토리텔링을 해줌으로써 장면의 의도를 진두지휘하는 주도형(active) 음악이다. 대부분의 프로듀서와 디렉터들은 자신의 필름에서 비디오가 항상 중심이 되길 바라므로 맞춤형 음악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곡가가 철저히 비디오를 위해 양보하는 음악을 스코어링(scoring)할 경우 최악의 상황엔 관객들이 영화의 크레딧(credit crawl)까지 다 보고 나서도 음악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기억 못 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것은 프로듀서의 요구와 본인의 성향이 반영되어 결과적으로 텍스처(texture)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리드 악기의 멜로디가 귀에 쉬이 띄지 않는 형태의 음악이 될 수도 있고, 비디오보다 음악이 부각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사운드 디자인 위주로 승부하는 음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0년대의 영화음악이 뉴웨이브(new wave)의 신스팝 장르와 결합된 이른바 네오 클래시컬 시대(Neo Classical Period)였다면, 90년대의 영화음악은 에스닉(ethnic) 요소와 결합한 월드뮤직의 전성기와 궤를 같이 했다.

 

그리고 2000년대, 짐머(Hans Zimmer)와 자블론스키(Steve Jablonsky) 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짐머 사단'은 새로운 영화음악 작법으로서 직선적이면서도 말초적이며, 공격적인 스트링의 스피카토(spiccato) 반주와 파괴적인 펀치감의 퍼커션(percussion)을 루핑(looping)시키는 호모포닉(homophonic: 단선율 주성부와 다음에 오는 다성의 화성) 텍스처의 사운드 디자인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2010년대에도 그러한 기류는 계속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2가지 새로운 스코어링(scoring)의 패러다임이 느껴진다. 하나는 2010<트론(Tron Legacy)>에서의 한스 짐머와 다프트 펑크(Daft Punk)와의 협업 및 2011<한나(Hanna)>에서의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의 작업이 돋보였던, 클럽 일렉트로닉이 적극적으로 가미된 미래지향적(futuristic) 스코어라 볼 수 있고(*** 이 담론에 대해서는 추후 다루도록 한다.) 다른 놀라운 하나가 바로 이 <그래비티(Gravity)>에서 스티븐 프라이스(Steven Price)가 선보인 프로그레시브 스코어다. '놀랍다'는 표현을 특별히 꺼내 들어야 했던 것은 이 영화음악의 튠와 색채가, 인간의 잠재 의식의 아주 수면 깊은 곳에, 어쩌면 지구의 것이 아닌 '무심한 초현실주의(indifferent surrealism)'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첫 문단에서 밝힌 주도형 음악과 맞춤형 음악의 구분법을 이 OST는 초월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음반의 음악이 그래비티라는 우주 영화를 소재를 한 것이지만 비디오의 조력자 역할을 하지 않고도(즉 영화와 음악이 함께 붙어 있지 않고도) 음악 자체만으로 독립적인 우주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말이다.

 

우주, 무중력, 북유럽의 자연, 라디오. 이것들의 일반적 이미지는 서로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질문을 듣고 어떤 것이 마음 속에 꿈틀댄다면 당신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광활하다. 표현을 한 쪽에서 열심히 해도 받아줄 사람이 아주 드물거나 없다고 느껴질 만큼, 광활하여 시간이 잘 느껴지지 않고 심지어 바닥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라디오는 시각적 이미지가 제거되었기에 광활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아무래도 소통보단 표현 중심이다. 결국 이것들은 안전 장치가 해제된 '무방비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비티의 음악은 위에서 밝힌 아이템들에 얽힌 철학이 음악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이와 같은 OST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적인(technical) 지식보다 철학적 이해가 반드시 먼저 수반되어야만 한다.

 



16. "Gravity"


그렇다면 과연 이 OST는 어떻게 일반적인 영화음악의 작법과 다른가?


 

첫째, 시공간의 둔감화. 음악에는 보통 '리듬' '베이스'라는 중력이 존재한다. 리듬은 템포를 그리는 엔진과 같아서 그것이 일정하지 않으면 규칙성이 떨어지고 시간의 흐름에 둔감하게 된다. 또 베이스가 없으면 음악이 위로 뜨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래비티의 음악은 규칙적으로 들릴 만한 리듬과 베이스를 대부분의 트랙에서 걷어 내었으며, 스트링과 웜 패드(warm pad)가 같이 지속적으로 깔리는 가운데 그 안의 공간을 최대한 열어 놓는다. 그것은 현실적인 어떠한 강박도 없어서 리스너로 하여금 무심함을 자아낸다. 중간중간 운석과 쓰레기가 지나가는 이미지의 형상은 베이스 신스(bass synth) 계열의 소스가 패닝(panning)으로 움직이며 우락부락하게 사운드 디자인을 연출한다. 우주 바깥의 기본적 형상이 아닐 수 없다. , 여기서 심우주에 숨어 있을 것 같은 신비로움이 탐미적으로 해석된 부분이 없기에 이것은 지구 바깥의 비현실적 느낌의 공간이지만 사실은 매우 현실적이다.

 

둘째, 평화와 공포의 공존이다. 음악에 대한 절대주의 담론에서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엔진이 멈춘 소유즈 호의 좁은 공간에서 발버둥치며 절망하는 여주인공 라이언 스톤의 모습을 우주 바깥의 카메라 앵글은 좌시하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는 광활한 우주는 무심할지언정 평화로움 그 자체다. 어쩌면 공포란 자신에게 직접 맞닥뜨려지지 않을 때는 극단적 이중성을 겸비한 우주 공간처럼 아무 일도 아닌 것인지 모른다. 우주는 본질적으로, 평화와 공포를 동시에 지닌 야누스적 존재다.

 

그래비티의 음악은 위의 본질을 잘 이해하며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크게 달라지지 않는 긴 호흡의 스트링과 패드의 조합 속에서, 공포가 다가올 때면 기존의 패턴을 크게 바꾸지 않은 채 그 위에 추가적인 스피카토 스트링과 브라스를 얹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체적인 일관성이 유지되면서 평화와 공포의 연출이 필요할 때면 모두 표현이 가능하기에 리스너는 감상하는 음악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 생명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음악의 예술성을 극으로 끌어 올리는 범상치 않은 의미를 내포한다.

 

영화의 이야기와 시각적 측면들을 여기서 완전히 배제하더라도, 무심한 초현실이 곧 현실이 되는 우주를 형상화한 컨셉 앨범 중 역사에 길이 남을 혁신적인 OST로 기억될 걸작이다. | surinmusi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