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 이미지는 글의 특정 내용과 무관)




커버곡이라도 나의 세계에 편입시킬 수 있다면

 

 

백만 명을 울리는 시대의 송가가 되건, 태어나자마자 아무도 모를 스완 송이 되건 밴드의 오리지널 넘버만큼 그 밴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건 드물다. 한 달에 두어 번 합주실에서 손을 맞춰 보고, 분기에 한 번 대관공연을 하는 것으로 만족의 선을 명확히 긋는 직밴이라면 몰라도 종종 어설프나마 자작곡을 선보이곤 한다. 하물며 음악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그 중요성은 차라리 사족일 터다.

 

한데 이 고유성을 얻기 위해서 밴드 혹은 연주자들은 수많은 커버곡을 연주해본다. 음악은 그 어느 예술 분야보다 단계성이 중시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악기는 처음 그 음을 구현하는 데 있어 기본적으로 역치 이상의 물리력이 필요하다. 허수경 시인의 말대로 악기란 고정된 세계를 나타내는 무엇이다. 그 세계가 일시적으로 허물어질 때에야 소리가 난다. 일단 이 과정 자체가 새로운 탄생이라 할 만큼의 난관이다.

 

흰 캔버스를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직관을 바탕으로 기가 막힌 스케치를 할 수는 있다. 아이폰을보자마자 이런저런 앱을 실행할 수 있는 5세 미만의 아이들은 우리 시대에 신화가 아니다. 또한 아직 걷는 것보다 할머니 등에 업히는 게 익숙할 나이에 석류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다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도 막연한 신화만은 아니다. 그러나 피아노를 처음 보는 아이가 한 달만에 고도프스키의 쇼팽 에뛰드를 연주할 수 있을 확률은 떨어진다. 음악에서 어쩌다 나온 천재를 검증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천재가 발굴 혹은 발견되기 어려운 것은 음악에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다.

 

해서 창작자이건 연주자이건 음악가가 되기 위해 거치는 수련의 기법은 일정 수준까지 일견 역사공부 혹은 생명체의 발생과정과도 비슷하다. 최초에 인간이 피치를 수학적으로 기록했던 그 단계부터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음악의 전체적 구조가 어떻게 건축되었고, 그 구조 어떤 식으로 복잡해졌는지 여러 곡들을 통해 익혀나간다. 이 과정은 클래식을 전공하려는 어린 재원들에게만이 아니라 어쿠스틱 기타를 처음 접―했으며 아직도 악기 하나 다룰 줄 알면 이성에게 인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석기적 환상에 젖어 있는 가련―한 대학 1학년생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구조를 익힌다는 것은 음악이 어떤 과정으로 발달해 왔는지를 파악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면 최초에 악기와 만날 때 접해야 했던 물리적 싸움은 이미 이 쪽의 승리로 끝나 있는 상태일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악기 연주를 오래 쉬면 손이 굳는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악기 연주는 자전거 타기나 수영처럼 생애주기적 메모리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매일의 훈련으로도 겨우 현상을 유지할 수 이는 운동능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하여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은 이중의 싸움을 하고 있다. 견실한 구조와 보기에 좋은 내 외관, 구상에 맞는 규모 등을 설계하는 지적 싸움을 진행하는 한편 가능한 한 많은 음악적 재료를 앗아내기 위해 악기의 물리적 저항과도 지속적인 전투를 치러야 한다. 물론 이를 싸움이 아닌 대화, 혹은 섹스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화도 섹스도 힘은 든다.

 

공연 중심의 밴드 음악인 경우에는 아무래도 악기와의 전투에 비중이 실릴 수밖에 없다. 전투를 잘 치르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주자 자신에게 특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현악기나 건반악기라면 손의 악력이 전략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관악기라면 폐활량이, 드럼의 경우에는 사지의 독립적 순발력이 관건이다.

 

여기엔 개인차가 존재한다. 이는 때론 결정적일 만큼이다. 커버가 피상적으로 연주의 재현이라는 인식을 그만두어야 할 필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어떤 곡이든 다른 이의 손에서 연주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전혀 다른 곡이다. 들리는 노트의 숫자가 같고 키가 같으며 음색이 유사하다고 해도 그 곡은 같을 수 없다. 한 음을 치더라도 거기엔 개인이 그 악기와 부딪쳐 온 역사가 반영된다. 열 명의 연주자가 랜디 로즈(Randy Rhodes) 버전의 “Crazy Train”을 연주한다면 그 곡은 각각 다른 10종류의 “Crazy Train”인 셈이다.

 

그렇다면 커버에 요구되는 덕목은 다시 설정될 수 있다. 먼저 원작자가 악기라는 세계와 자신의 몸을 해석하고 관계짓는 방식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그 곡을 커버하더라도 얼마만큼 자신의 몸을 통해 스스로의 세계에 편입시킬 수 있는지. 즉 하나하나의 음으로 자기가 악기를 대면한 역사와 그를 베이스로 음악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의 각오를 일목요연하게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가, 거기에 초점이 맞춰질 필요가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클럽 공연이나 오디션에 커버곡은 듣기 힘들어졌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밴드의 을 깎는 것으로 간주되는 분위기다. 정말로 양오음커(양지에서 오리지널을 연주하기 위해 음지에서 커버를 한다)’하겠다는 태도라면 칭찬받을 만하다. 하지만 자작곡이 트렌드고 커버가 시쳇말로 짜치는분위기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요소를 우겨넣은 듯한 자작곡만 하고 있는 거라면?| 한명륜 evhyj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