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 기타…학구적 튠과 히피(hippie)적 튠의 조우

 

언뜻 모범적이고 단조로운 구성처럼 비춰지나 좀 더 들여다 보면 정곡을 찌른다. 사운드트랙의 인상적인 기획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도형(active) 음악보다는 맞춤형(passive) 음악으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낸 오리지널 스코어(original score) 작곡가보다, 영화에 쓰인 다양한 튠의 기획을 담당한 음악 감독(music supervisor) 메이슨 쿠퍼(Mason Cooper)의 직관적 통찰에 눈길이 더 간다. 작곡가의 관점보다는 음악 감독이나 음악 프로듀서의 관점에서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다.

 

O.S.T.,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애플(Apple)의 조물주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 얽힌 이미지와 철학을 음악적으로 탁월하게 파고들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영화에 대해, 혹자는 잡스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감성이 없다는 연유를 들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만큼 영화의 시선은 페이소스(pathos: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극적 표현 방식)가 극중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만큼 관조적이며 냉철한 관찰자 시점이기 때문이다. 재미와 감동의 이분법적 분류에 따라 한바탕 웃고 우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픈 관객에게 이 영화의 연출은 무심하다. 잡스의 가치관과 그로 인해 불거지는 극적 이야기들을 관찰하며 관객은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스스로' 깨달음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데, 만일 잡스의 독불장군식 메시지에 공감을 못 받거나 거부감을 느꼈을 지라도 영화는 개의치 않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위의 혹자의 말을 뒤집어 표현하면, 관객에게 무엇을 느끼게 만들겠다는 일말의 강박이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 관조적 입장을 음악의 튠은 그대로 수긍하며 재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외치는 사회 부적응자, 반항아, 말썽꾼, 미치광이의 소수가 실제 다수의 세상을 바꾼다는 잡스의 신념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중심을 좇다가 다른 경쟁자들을 누르고 꼭대기에 오르는 기업가적 사고가 아니라,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깜짝 놀랄만한 창의적인 혁신을 들고 나타나 독보적인 존재로서 세상에 족적을 남기는 예술가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세상을 철저히 자신의 직관에 대입하여 바라보기에 다른 이들이(심지어 친구조차도) 잡스의 비전을 향유하지 못한다면 가차 없이 아웃이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완벽주의의 실현이 오직 제1의 우선순위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독단적 열망을, 하지만 스스로에게 진실한 정열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품었던 이상적 가치관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엘리트주의(elitism), 다른 하나는 바로 히피(hippie).




Track 1. "Steve's Theme-Trilha Sonora" (Main Title)


교과서적인 온음계 장조(diatonic major scale)야말로 엘리트주의의 음악적 형상

 

하농과 체르니, 스칼라티 소나타, 바흐 인벤션. 이들 피아노곡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구조적으로 정형화된 완벽한 이론적 원형을 토대로 다양한 키(key signature)에서 고루 짜여진 온음계(diatonic) 작법이 체계적이면서도 직관적이어서, 피아노로 이들 작품을 연주할 때면 교과서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감정이 최대한 배제된 지적 창의의 발현이기에 빈틈이 없을 만큼 학구적이다.

 

'특별한 소수가 다수를 움직인다'는 잡스의 엘리트주의는 그래서 음악적 기조로 볼 때 위와 같은 온음계 작법이 선형적(linear)으로 펼쳐진 바로크/고전파 클래식 음악의 튠에 비견될 만하다. 거기에 더해진 진취적 생산성의 기운은 마이너(minor scale)보다는 메이저(major scale)가 더 어울린다.

 

잡스의 메인 테마 음악은 위와 같은 온음계 장조의 기반 위에 덧붙여 토닉(tonic: 1도 화성)이 주는 무게감이 크다(*** 스코어(music score) 스타일에서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토닉의 무게감에 관련한 깊은 담론에는 흥미로움이 있다. 추후 별도로 다루도록 한다). 토닉에서 화성이 아주 멀리 나갔다가 우여곡절의 모험 끝에 돌아오는-심지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영화음악의 진행이 극적(epic)이라면, 이 트랙의 음악은 토닉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이후 확장되는 듯 싶다가 이내 제자리에 돌아옴으로써, 극적이기 보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해 상대적으로 토닉의 무게감을 끌어올린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교과서적, 학구적인 오케스트라 튠도 역시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루한 단순 루프 음악으로 전락하기 십상인데 이 트랙에서는 2절 처음 오보에(oboe) 솔로가 다른 스트링들이 피아니시모(pp)로 숨죽인 가운데 토닉 위에서 자유스럽게 연주하더니, 뒤로 갈수록 전조(modulation) 3도 화성(mediant)이 새로 가미된 변주가 등장하며 매너리즘의 위험을 타개하고 있다. 또한 컴필레이션 스코어(compilation score: 오리지널 스코어의 대비 개념으로, 기존에 만들어진 음악을 컬러와 톤이 맞는 영화 속에 삽입한 배경음악)로 쓰인 바로크 말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o) No. 3 Allegro의 선형적인 온음계 진행은 잡스의 엘리트주의 철학을 꿰뚫고 있는 튠 그 자체다.




Track 6. "Scarborough Fair"



엘리트주의에서 결여된 감성은 히피(hippie)적 표현에서 채워진다

 

잡스가 믿는 베이컨식 엘리트주의가 좌뇌에서 구조화된다면 그것이 우뇌적 감성과 만나 밖으로 표출되는 방식은 다분히 히피적이다. (*** '히피'는 어마어마한 담론 중 하나이므로 히피와 사이키델릭이 음악으로 표출되는 상관성에 대한 담론은 추후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그럼 히피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 '사람은 저마다 다를지언정 세상은 하나(A variety of people, but it's one world)'라는 것이다. 즉 서론에서 언급한 '예술가적 사고'와도 같이, 세상을 ''를 통해 이해하므로 결국 하나하나 사람들(사고하는 생명체) 모두가 소우주(microcosmos)가 되는 가치관이다. 같은 인종, 민족끼리 뭉쳐 살면서 여러 국가와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역발상이다. 존 레논의 Imagine에서 나타나는 가사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를 이해하면 된다(그렇다. 존 레논(John Lennon)도 히피였던 것이다!).

 

'하나된 세상'은 가치관이 다른 소우주끼리 서로 싸우며 피흘리며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닌, 저마다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창의라는 탑을 쌓으며 발전하는 것이기에 남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어서는 안되는 관조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악기 기타와 음악 안 마디 사이사이에 열린 자유스러운 공간들, "Green Sleeves"와 함께 지금까지도 전세계 사람들에게 불리는 영국 전통민요 "Scarborough Fair"는 이런 측면에서 완벽한 히피적 튠이 아닐 수 없다. 컴필레이션 스코어로 실린 캣 스티븐스(Cat Stevens)“Peace Train”에서 나오는 진취적인 컨트리(country) 색채 또한 히피적 컬러를 나타내기에 적합하다.

 

끝으로, 음악과는 별도로 잡스(Jobs)의 영화 포스터에 쓰인 사이키델릭한 색채 구성과 그의 진중한 눈빛이 지금까지 설명한 엘리트주의와 히피 정신을 모두 한 컷에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면 이것이야말로 백문불여일견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은 처음 보자마자 그 포스터의 본질을 생각해 보았는가? 세상을 자신의 특별한 학구적 창의로 바꾸고 싶은 히피들을 위한 에너지 드링크와 같은 O.S.T.가 바로 이 곳에 있다. | 송윤규 surinmusi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