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이 레이블 발전소(Baljunso)’에 투자하기로 한 것을 놓고 음악계가 설왕설래로 설레고 있다. 단순한 지분투자일 뿐 어떤 야욕을 예단해서는 안 되며 설령 그렇더라도 뮤지션들에게 오히려 기회라는 의견과 씬과 필드의 물을 흐리는 서브레이블 런칭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아직 가치판단은 이르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제언은 너무 거창한 듯하여 부제로만 빼 보았다.

글·이미지_한명륜

 

 

반갑지만 여전히 복잡한 당신

 

이번 투자를 놓고 음악 및 연예관련 매체들의 헤드카피는 ‘SM의 인디진출(접수)’라는 식이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제목이긴 하지만 센세이셔널리즘은 언론의 먹고사니즘으로 그 정도는 애교라 보자(국회도 상시특검에서 범 자기식구들이 걸려들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배제했으니까). 오히려 이 이슈를 통해 리콜된 인디라는 용어와 그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반갑다.

 

이 용어는 나름 20세기 음악산업의 중요한 장면들을 압축 및 상징하는 용어다. 특히 동시대 문화개념 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위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대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원래는 1970년대 영국의 경제 위기 이후 기획형, 공장형의 영국 대중음악 산업을 대신해 젊은 세대의 창작에너지를 가감 없이 대변할 수 있는 독립적 음악생산과 유통의 구조를 뜻했다. 즉 산업적 측면에서의 독립(independent)을 강조한 개념이라 보면 된다.

 

물론 현재는 영미권이나 유럽 등 주요 음악시장 현지에서도 인디는 이런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현재의 인디는 차라리 어떤 스타일적 특성을 말하는 용어가 됐다. 이는 한국과 영미 유럽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음악 씬에서 인디가 애초부터 스타일 용어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분명 한국에서도 기존 기획사들의 제작 시스템을 거부하는 태도를 선보인 독립 음악과 그것의 증거가 되는 일련의 결과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독립 음악의 성격과 음악적 환경을 떠올리거나, 혹은 그에 해당하는 자료들을 통해 상황을 더듬어 본다면 그것은 서울의 2호선 라인 인근 대학들을 중심으로 한 컬리지 락의 성향이 강했다. 특히 유학을 다녀온 타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밴드를 결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잠깐 엘리트, 컬리지 락적 성향을 언급한 것은 한국의 인디가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이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이들 중 몇 명이나 자신들이 어찌 됐든 마이너인 씬에 머무르기를 바랐을까? 일반화할 수는 없어도 인디 음악의 창작자, 그리고 주변에서 담론을 만들던 이들의 동기는 언젠가 그들이 경륜을 얻게 됐을 때 사회의 제도권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인디 음악이 산업구조적인 의미보다 어떤 댄디적 외피가 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밴드 카운터 리셋@2013 잔다리 페스타: 상기 이미지는 컬럼의 특정 내용과 무관)


 

인디, 좋아하시는 데는 이유가?

 

물론 인디라는 용어의 의미가 완전히 변용된 그 개념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발전소 레이블 지분투자를 진행한 SM의 행위는 어떤 측면에서는 인디의 본래 개념에서 파생된 의미에 가치적 속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소 뜬구름스럽지만 ‘SM은 음악 자체를 중시해 왔다는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오랫동안 SM을 비롯한 거대 기획사의 꼬투리가 돼 온 것은 음악 제작에 있어서의 진정성문제였다. 어찌 보면 드립같은 용어지만 이를 상품 제작 및 유통에서의 윤리 정도로 치환하면 이해가 가능할 문제다. 90년대 락 음악과의 대결구도(“SM K-POP | 케이팝과 록 스피릿’: 어떤 K-POP은 왜 복잡해졌는가최민우, 웨이브, 2013. 3. 27같은 특정시기적 테마나, 표절 논란처럼 상당히 긴 시기를 아우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찮다면 하찮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논란들은 어쨌든 이들 기획사들로 하여금 반가울 것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거대 가요기획사들은 그런 의심을 받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고수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엄밀히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고,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첫번째의 덕목은 원가의 선택적 절감이다. 소속 연예인의 외모관리, 뮤직비디오 제작, 매체 홍보 등은 포기할 수 없는 비용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음악에서 원가는 절감돼야 한다. 그러나 절감됐다는 티를 내선 곤란하며 오히려 여기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유기성 대신 화려한 요소들의 누적적인 결합,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얻은 혹독한 절창 퍼포먼스, 외국인 작곡가의 존재에 대한 홍보와 인위적 조성.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 시스템에서의 논리, 아니 순리.

 

하지만 순리대로 사는 건 쉽지 않다는 게 이들 기획사들의 입장에서도 남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것 또한 순리인데, 당연히, 그들의 결과물을 보는 눈과 그들이 만들어낸 것에 기울이는 귀가 많기 때문이다. 개개의 결과물마다 얄팍한 표절로 원가를 절감하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은 이제 쉽지 않은 일이 됐다.

 

해서, 여기서부터는 좀 더 다른 전략이 필요해진다. 우리 좋은 일도 해라는 이미지적 전략이다. 시스템화와 비용 절감, 그리고 루트를 독점한 매체홍보 등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할 만한 사업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뜻이다. 비교적 창작자들의 목소리가 존중되지만 자본금이 부족한 인디라고 쓰고 마이너라고 읽는 레이블들에 투자하는 행위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다. 물론 SM이 발전소 레이블에 투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하기에는 위험―논리적, 글쟁이 생계적―이 따른다. 다만 정황상 이미지 전략에 임하는 기업의 전반적 경향을 따르는 모습으로 보인다,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창작의 신화? 보다는 환상

 

하지만 이런저런 점을 양보하더라도 SM의 이런 이미지 전략 진행은 한 가지 자충수를 두고 있다. 즉 창작자 중심의 음악집단을 후원함으로써 증명해야 할만큼 그들 내부의 크리에이티비티를 확신하지 못함을 어느 정도 내비친 셈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익히 접하는 예술가의 개념은 근대 이후 예술에서 패트런(후원자)과 제작자의 관계가 산업구조의 복잡성으로 인해 멀어지면서 등장했다. 엄밀히 따지면 지금 창작자들의 패트런은 대중이다. 하지만 대중은 실체를 찾고 정체를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 혼란함의 와중에 창작자는 주문제작자의 옷을 슬그머니 벗고 아티스트의 연미복을 입은 형태다. 물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사람들의 물신적 욕망이 노골화되며 이런 갈아입음의 과정은 인류문화사에 대비했을 때 상당히 짧은 기간에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예술가, 혹은 창작자라는 타이틀의 아우라가, 그것의 용도폐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엔터테인먼트 거대기업들에 의해 겉으로나마 칭송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존중이나 감성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메커니즘이다. 또한 어떻게 이번 사안이 이미지 전략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연도 될 터인데, 한 기업과 한 레이블 간에 알려지지 않은 저간의 사정은 논외로 하고, 대중의 인식 속에서 창작 중심의 음악집단으로 여겨지는 이들은 바로 거대 음악집단의 피해자라는 다소 막연한 논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막연하고 적확한 근거를 대기 어려운 논리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매스 미디어 및 홍보 루트 독점 등의 행위가 어느 정도 거대 자본의 도움 없이 창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돌아갈 기회를, 본의든 아니든 앗은 게 된다는 건 맞다. 그러나 생각보다 창작 중심으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거대 연예기획사들이 개인적, 프로젝트적으로 인연을 맺고 윈윈하는 경우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공허한 대결구도는 도대체 뭣 때문에 쓸모가 있는 건가? 상당수 대중들은 거대기획사의 결과물을 보며 흥분하면서도 곧 자신이 사회경제적 게임판에서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디뮤지션들일 수 있다. 결국 거대기획사들은 어떤 계기로 완벽한 좌절이 사회를 덮어 결국 자신들의 존재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는 묵시록적 세계를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우는 다소 다르지만 영화 <변호인> 1000만 관람 열기의 구조적 원인을 못 보고 기업 담당자 직원의 가장 됨’, ‘인성등을 내세운 홍보 블로그의 톤을 떠올린다면, 아주 미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이미지 전략이 먹힌다면 과연 인디뮤지션의 창작이라는 덕목은, 최근 대중음악 비평에서 제기되는 창작자의 신화가 빚은 질곡이 될 것이다. 결국 창작자의 권리에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투사하는 소시민들의 소박한 바람이 사태를 이리 끌고 오는 데 한 몫을 했다면 너무 억울할까.

 

그렇지만 이번 SM의 지분투자, 그리고 이전에 있어 왔고 이후에도 있을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서브 레이블 설립 등 한국의 경우만으로 문제를 좁히게 되면, 창작자 됨을 신화로 보는 것은 탁상 비평일 터다. 신화는 금기와 결합하여 권력을 낳을 때 비로소 신화라 부를 만한 것이 된다.

 

냉정히 봤을 때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휘말리는 표절 시비는 그야말로 시비에 불과하다. 한국의 대중음악 산업에서 창작자는 그런 권력을 낳을 만한 신화적 존재는 못 된다. 잘 해야 환상정도? 신화건 환상이건 간에 창작자가 합당한 가치를 요구할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발성을 터득하는 게 더 근본적인 과제다.




(블랙백@2013.12. 29 상상마당 단독공연)


 

어쨌든 응원합니다, 인터뷰 질문지 검열만 하지 않는다면

 

지엽적인 문제를 조금만 더 끌고 가려 한다. 먼저 SM의 발전소 지분투자에 대해 딱히 가치 판단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음악사의 수많은 용어가 그 개념이 뒤바뀜으로 새 용법을 얻었던 것처럼 인디가 보여 주고 있는 의미의 혼란도 결국 유구한 세월 앞에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SM이 지분투자를 통해 어떤 야료를 부릴지에 대해 예단하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 제언하고 싶은 바는 있다. 이 따뜻한 봄날, 그렇게 인디가 좋다면 지켜줘야 할 예의 같은 것 말이다. 창작자 중심의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라도 하려면 먼저 인터뷰 질문지 검열, 섭외에 있어서 뮤지션의 의도가 아닌 의도적 배제 등은 행해지지 않아야 할 터다.

 

인디 음악 씬에서 뮤지션과의 인터뷰는 상당히 의미를 갖는 작업이다. 음악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은 분명 흥미롭다. 그 대화의 과정을 통해 씬은 풍요로워지고 뮤지션은 자신의 음악과 삶을 단계별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창작자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개인이 아닌, 한 씬에서 나고 자란 개인이 보여 줄 수 있는 그 씬의 단층 시료 같은 존재다. 간단하지 않은가. 인간의 삶이 그대로 역사이기에 가능한 진술이다. 이 기회를 협조라는 미명 하에 이 질문은 빼주세요’, ‘저희랑 맞지 않는 질문일 것 같네요라는 식의 행위를 통해 통제하려는 행위는 없어야 한다.

 

물론 내일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음악매체를 중심으로 글쓰기를 해나가고 있는 나 따위에게 협조를 잘 해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 역시도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들이 공중파의 주목을 받는 게 뿌듯하다. 그러나 그런 뿌듯함과, 제한된 창구로서만 창작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건 무를 수 없는 참혹이다.

 

이번 투자행위에 관련된 실무자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일 터다. 불행한 이들보다 행복한 이들이 나은 게 나은 거니까, 응원하고자 한다. 추후 다른 형태의 지원방식도 개발하고 있다면 반갑겠다. 그러나 지분을 투자한 기업의 문화는 투자받은 기업에게로 은연중 흘러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