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액션 중에서도 슈퍼히어로 스코어superhero scores는 헐리우드 영화음악의 가장 화려한 꽃이다. 모두의 기억 속 깊은 곳에 항상 자리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은 격변의 세상 속에서도 마치 도덕 교과서와 같이 사람들의 무의식을 지키는 불멸의 주인공이다. 그래서일까. 적지 않은 영화음악가들이 악의 무리로부터 정의와 인류를 수호하는 영웅의 거대한 모험담을 음악으로 담고 싶어한다. 외적인 배경도 물론 있다. 소수 엘리트의 리더십이 다수의 대중을 이끌어가는 사회 문화가 발달한 미국은 독립적, 희생적 영웅 정신과 인류애를 기리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제작이 아주 보편화되어 있다. 아카데미 작품상과는 가장 거리가 먼 장르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여느 영화보다 가장 상업적인 성공이 보장된 장르이기도 하며, 슈퍼히어로 영화의 스탭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커리어 상으로도 자랑할 만한 상징적 필모그래피로 헐리우드에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슈퍼히어로이기 이전에 너무도 인간적인 스파이디, 그가 불러 일으킨 음악적 영감과 미학

 

스파이더맨은 일반적 슈퍼히어로와는 확연히 다른 기질이 있기에 음악 스코어의 컬러에 이색적인 요소를 부여한다. 그것은 바로 부족함에서 오는 열등감이다.

 

만화 원작의 주인공 피터 파커Peter Parker는 왜소한 체구에 착하고 수줍음을 타며 영리하지만, 힘센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돈 문제에 시달리고 여자들에게 무시당하곤 하여 도리어 관객이 힘을 주고 응원해 주고 싶은 10대 청소년이다. 그는 방사능에 노출된 실험용 거미에 물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되지만 그 행운을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혼내주고 장차 TV의 인기인이 되어 돈을 벌며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의 관심을 얻으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이후 벌어진 삼촌의 죽음과 그에 대한 복수, 불량배들의 소탕을 통해 자신의 힘을 분노와 열등감의 해소로 표출하기도 한다. 사회에 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피터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삼촌의 가르침을 실감하면서 점차 악을 물리치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콘크리트 정글을 누비는 영웅적인 풍모의 스파이더맨으로 성장해 간다. 개인적 열등감을 안고 있던 소시민이 대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는 관객들은 카타르시스와 더불어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마련이었고, ‘스파이디Spidey라는 애칭으로 스파이더맨 캐릭터의 개념적 명칭을 '인격화'하였다.

 

스파이더맨은 슈퍼맨처럼 외계 행성 크립톤에서 선천적으로 받은 거대한 힘도,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처럼 막강한 자금력에서 동원되는 최첨단 수트와 장비도 없다. 웹 슈터라는 거미줄 발사기의 개념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부터 새롭게 등장하긴 하지만 실험용 거미에 물려 우연히 생겨난 초인적인 힘은 처음부터 개연성이 미약한 플롯이므로 시간이 지나 그 능력이 다시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언제고 덧붙임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때문에 무거운 장비 하나 걸치지 않은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밤공기를 가로지르며 빽빽한 마천루 사이를 거미줄 하나로 공중곡예를 하는 장면은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간담 서늘한 공포는 동시에 환상적인 희열과 낭만, 자유로움, 고독감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음악가들이 좋아할 만한 극적 감정들이 실로 복합적으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본 영화에서는 만화 원작과 영화의 전 트릴로지trilogy(3부작)에서 나타난 주인공의 열등감이 덜 강조된 면이 있지만, 자신의 컴플렉스에서 해방감을 느끼기 충분한 스파이더맨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민첩한 액션 스코어임에도 열망적 카타르시스를 음악 안의 미학으로써 풀어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Track 16. "Lizard at School!"


대중을 의식한 무난한 모방보다 예술가의 명예를 걸고 창의성을 쏟아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작곡가 제임스 아너James Horner<스파이더맨1, 2>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맡았던 대니 엘프먼Danny Elfman이 구축한 스파이더맨의 상징적인(iconic) 메인 테마를 계승할지, 아니면 그만의 색깔로 재정립해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여기서 잠시 그것을 소개하자면, C#m G E B로 이어지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세계의 기묘한 하모니 조합 위에 B장조의 구성음들을 온음계적(diatonic) 멜로디인 양 천연덕스럽게 수놓은 것이 바로 엘프먼의 메인 테마다. 이전의 <배트맨> 시리즈에서 그가 구축한 트라이톤(tritone)의 수평 음정(horizontal interval: 요컨대 두 하모니의 근음 간격이 트라이톤(4도나 감5)이라는 의미), 공통음 전조(common-tone modulation: 두 하모니의 공통 구성음을 매개로 서로 다른 조성을 연결)의 활용을 기반으로 한 작법이 자유분방하게 펼쳐진 명작 튠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대니 엘프먼의 음악 세계는 추후 <배트맨> 스코어를 다룰 때 좀 더 음미해 보고자 한다. 그의 음악이 분출하는 휘황찬란한 지배력(dazzling mastery) <스파이더맨1> 2탄의 과함에 비해 전체적으로 자연스럽지만, 메인 테마는 1, 2탄 모두 절정의 예술미를 드러냈다는 생각이다).

 

스파이더맨4의 제작을 예고했던 샘 레이미Sam Raimi 감독이 스토리 조율의 견해 차를 좁히지 못해 제작을 중단하고 마크 웹Mark Webb ('거미줄(web)' 감독이라니, 이 만남은 운명인가) 감독이 리부트reboot 버전으로 새롭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제작하게 된 배경은 제임스 아너로 하여금 오리지널 스코어 역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스파이더맨 음악을 만들어야 할 일종의 사명감을 심어 주었다. 지극히 상징적이었던 대니 엘프먼의 찬란한 메인 테마의 아성에 맞서기 위해 결과적으로 아너는 대중을 이미 황홀케 했던 기존 음악을 단 하나의 모티브도 모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값(Horner)에 걸맞는 예술가의 명예(honor)를 걸고 그만의 세계를 최대한으로 표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역사상 최고 흥행 영화 <타이타닉>(2억 달러 예산으로 총 수입 18 4천만 달러 기록)으로 역대 영화음악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의 반열에 올랐지만 '마성의 천재' 대니 엘프먼에 비해 정통 액션 스코어의 독창성(originality)을 뽐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그로서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그의 액션 감각을 선보일 수 있는 절대 절명의 기회였던 셈이다. 아너의 스파이더맨 메인 테마는 엘프먼의 것에 비해 프레이즈의 호흡이 길어 인상의 강렬함은 덜하지만 멜로디는 더 유려하고 잘 다듬어진 측면이 있어 뒤의 여운이 짙다.

 

특히 위의 16번 트랙을 들어 보면, 평소 도약식 진행(leaping motion: 3도 음정 이상으로 근음이 크게 널뛰는 진행)보다 계단식 진행(stepwise motion: 2도 음정 이하로 근음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진행)으로 서스펜스suspense를 즐겨 만드는 아너의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중간의 오스티나토ostinato(액션 스코어링의 한 방법으로 주로 홀수 박자의 음형이 반복되게끔 하는 것)라든지, 후반부에 무려 10마디 동안 계속 상승하는 계단식 진행 안에동기(2마디) 단위로 액센트를 가미한 하모니가 그의 메인 테마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도록 의도한 발상들은 즉흥적 감성보다는 구조적 이성을 중시하는 그의 음악관을 잘 설명해 준다. 이 부분은 결과적으로 앞 부분에서 꾸준히 쌓아 올린 에너지가 응집되면서 트랙의 가장 큰 클라이맥스가 되었다. 액센트로 가득한 액션의 향연이 아닌 점진적이며 체계적인 액션 스코어를 연출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해 보인다.

 

이 트랙에 있는 두 군데의 뚜렷한 클라이맥스 중 다른 한 부분은 오스티나토 이후 퍼커시브 신스(percussive synth) 솔로에 이어서 바로 풀 스트링의 8비트 스피카토spiccato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8비트의 상향 진행 스트링에 16비트의 퍼커시브 신스가 한데 어울리며 오케스트라 편곡임에도 마치 딜레이 효과를 듣는 듯한 신선함과오스티나토의 오랜 불협 이후 마침내 쏟아지는 협화음의 쾌감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악당 리자드Lizard에 불리하게 당하고 있던 스파이더맨은 바로 이 스피카토 섹션에서부터 피 끓는 반격을 시작한다!)



Track 17. Saving New York


난데없이 등장한 톤 클러스터의 비밀


영화 후반부에 펼쳐지는 하이라이트 전투 씬에 쓰인 17번 트랙에는 본 영화 OST를 오래도록 기억되게 하는 인상적인 장치가 포함되어 있다. 바로 중반에 모든 악기를 일제히 사라지게 하는 신호로 활용된 피아노의 톤 클러스터tone cluster(2, 2도의 인접한 노트들을 한꺼번에 눌러 덩어리로 표현하는 현대음악 작법. 쇤베르크Schoenberg, 바르톡Bartok, 메시앙Messiaen 등에 의해 수학적 원리가 적용된 집합론(set theory)으로 체계화). 총 네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이 클러스터는 집합론을 결부시키기엔 양적 비중이 미미하나 단순히 좋은 사운드 디자인 아이디어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사뭇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작지 않다.

 

우선, 액센트를 크래쉬 심벌이나 큰북, 저역대의 브라스 튜티tutti(전 합주) 등의 멜로딕하지 않은 성향의(non-pitched) 악기들로 연출하곤 하는 통상적인 액션 스코어로부터 파격을 주었다. 그럼 리스너는 왜 이 부분이 '음악적'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인지하게 될까? 그것은 흔히, 세상 모든 악기 중 가장 멜로딕하다고 여겨지는(pitched) 피아노를 가장 멜로딕하지 않게 액센트로 처리한 역설의 미학이 전해지기 때문이다(지난 명상 음악 칼럼 2부에서 '음악적이다'라는 말 속에 담긴 '수사적 가공을 통한 해석'의 관념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오션 드럼(ocean drum)이 파도 소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예술미를 한번 기억해 보자).

 

피아노는 악기론에 따르면 코도폰chordophone(현의 공명을 통해 소리를 발생시키는 악기)으로 개념상 분류되지만 사실 기능적인 관점에서는 건반을 두드림으로써 소리를 내는 타악기이기도 하다. 피아노 연주자는 피아노 본체 안에서 현이 튕겨지며 피치를 만들어낸다는 원리보다 건반을 '치는' 것이 직관적으로 익숙한 것이다. 결국 이 트랙에서의 피아노의 등장은 오케스트라 편곡의 액센트를 위해 숨겨 왔던 피아노의 타악기 본능을 일깨우는 동시에, 여러 피치가 모인 클러스터가 되려 어떤 피치도 제대로 들리지 않게 한 역설의 미학을 낳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주관적 해석을 좀 더 가미한다면, 제임스 아너는 자신의 주 악기가 피아노인 음악가다. 모든 오케스트라 악기가 일순간 사라지면서 이전에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던 피아노가 갑자기 전면으로 튀어나온 것은, 앞서 언급했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스파이더맨 음악을 오로지 자신의 작가 정신을 통해 탄생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하나의 상징일 터이다.

 

 

때려 부수는 스코어링을 지양한 액션 스코어의 로맨틱한 감동

 

강력한 펀치감으로 충격을 바로 선사하는 한스 짐머 사단의 블록버스터 음악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액션 스코어링도 구조적 이성으로 이렇게까지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본 영화의 스코어는 유감없이 보여 줬다. 제임스 아너와 가장 공통된 음악관을 지닌 음악가 중 한 명인 앨런 실베스트리(Alan Silvestri)가 같은 해(2012) 선보인 <어벤저스> 음악 또한 액션 스코어링의 이성적 체계화를 시도한 흔적이 상당하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그런 접근의 완성형을 마침내 꺼내 보인 신선한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필자가 현대의 오리지널 스코어 음반을 하나 구입할 때 이 OST <그래비티> OST 사이에서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그래비티>는 최근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며 프로그레시브의 음악적 혁신이 이제 널리 소개되었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액션성 안에 담긴 로맨틱한 감동의 예술미가 '관념적인 혁신'이기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측면이 분명 많다고 여겨진다. 혹 그것이 앞서 이야기한 슈퍼히어로 영화 장르의 일반적 징크스일 수도,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의 기대만큼 팬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영화적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제임스 아너가 해석한 스파이더맨이 대니 엘프먼이 해석한 스파이더맨의 거대한 독창성에 비견될 만한 독자적 심오함을 보여 주었다는 대목이다. 강력한 한 방의 메인 테마는 엘프먼이 창조한 튠에 비해 다소 부족하나 OST 전체에서 점진적으로 배어 나오는 구조미는 오히려 아너의 트랙들이 더 견고하다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오케스트라 속에서 낯설지만 맨 앞으로 뛰쳐나온 피아노의 톤 클러스터와 같은, '역대 영화음악가' 중 한 사람이라는 자신의 명예를 건 포효다. | 윤규 surinmusi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