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이 부르는 모던 조선: 1930년대 재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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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지각 경험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은 물리적인 면에서나 심리적인 면에서나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심리적인 삶은 시간축에서 미래의 방향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급히 오간다. 물리적으로 계속 전진하는 물리적 삶 속에서 말이다.

 

여기 평면 위에 거꾸로 세워진 하나의 원뿔을 상상해 보자. 원뿔은 더 커지고 있고 평면과 닿은 점에 어떤 이미지나 영상이 원뿔의 잘린 단면에 비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원뿔이 커지는 방향이 인간의 물리적 삶이고, 꼭지점이 닿은 평면은 어떤 사건과 맞닥뜨린 경험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심리적 삶은 무수히 존재하는 원뿔의 단면과 그 사건이 되는 꼭지점을 오가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큰 단면에 비치는 그 사건의 이미지는 조금 흐려질 테지만, 사건의 시점과 현재의 단면 사이를 오가는 심리적 삶의 기록과 여정을 통해 그 단면을 어떤 의미에서든 다채롭고 풍요로워지며, 유일한 것이 된다. 이는 19세기말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이 저서 『물질과 기억』을 통해 인간의 경험과 기억행위를 설명할 때 사용했던 도식으로 저 유명한 기억 원뿔(Bergson’s Memory cone)’이다.

 

사건과 인간의 물리적∙심리적 삶, 그리고 기억의 재현을 다룬 이러한 도식에, 글의 첫 문장을 대입해 본다면, 인간에게 가능한 역사와의 대화, 그것에 대해서도 이해가 될 터다. 따라서 어떤 분야가 됐건 역사연구자는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심리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일 터다. 해서 역사연구자가 펼쳐 놓는 결과물은 단순히 과거 행위를 떠내듯옮겨내어 틀에 고정시키는 작업이기보다는 오히려 과거 어느 시점과 어느 공동체의 물리적 삶의 단면인 현재를 바삐 오간 여정에 가까울 터다.

 

[장유정이 부른 모던 재즈송](㈜대신미디어, 2013)은 음악사가 장유정이, 1930년대의 재즈 송이라는 사건(event)이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물리적 삶 속에서 비쳐지는 방식을 담은, 말하자면 이 공동체의 심리적 삶의 과정을 음악이라는 틀로 구현해낸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음반을 냈으니 뮤지션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만, 결례를 무릅쓰고 필자는 그를 음악사가로 보는 한편 이 음반을 앞서 언급한 베르그송이 말한 기억 원뿔의 한 단면으로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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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최승희, 전수린, 손목인, 이부풍 등 1930년대 음악인들이 남긴 곡을 들을 기회는 KBS <가요무대>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희박하다. 과거 전영혁 등의 심야방송 DJ들이 복각판 CD를 특집으로 다룬 적도 있지만 이러한 작업 역시 1930년대 가요들을 유산으로 다루는 데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물론 과거의 원전은 원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사료와 역사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사료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대화하며 그를 통해 또 다른 현재로 빚어지는 것이 역사다. 또한 인증이기보다는 업데이트다. 지난 해인 2012 5월 발표된 디지털 싱글 외로운 가로등으로 시작한 [근대가요 다시부르기]로 이미 확인된 바 있지만 들어보지 않은 이를 위해 전하자면, 이 음악은 고색창연한 또 다른 오빠는 풍각쟁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편곡에 채용된 스타일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가요가 나타났던 다양한 방식을 투영하고 있다. “정열의 산보에서 밀도 가득하고도 명료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가요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며, “추억의 탱고다방의 푸른 꿈등은 유학파 뮤지션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요소요소에 자리잡은 이후에 들을 수 있었던 클럽 기반 재즈의 향취를 선사한다. 그런가 하면 리라꽃은 피건만”, “희망의 블루스, 1930년대 가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요무대>적 편곡을 선보인다. 혹여 있을지도 모를, 이 시대를 기억하며 음반을 집어들 노년 청자를 배려한 것일까.

 

첫 곡 이태리의 정원과 마지막 곡 사막의 한은 상징적이다. 곡을 제시하는 목소리는 각각 옛 음원에서의 최승희와 고복수의 그것이지만 곡이 전개되면서 현대적인 스타일의 편곡으로 몸을 바꾼다. 전자는 순간순간 섞여드는 보코더와 얕은 울림의 신서사이저가 2000년대 인디팝, 후자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모던 락적 질감이 있다. 이 두 곡은 그 위치상으로 1930년대 시공간과 현재를 오간 기록을 수미일관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의지였을까, 혹은 웜홀의 이쪽과 저쪽일까. 어느 방식으로 생각하든 본질은 큰 변함이 없을 듯하다.

 

만듦새에 관해 약간 논하자면, 다양한 스타일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마스터링에 대한 일관된 플랜이 적용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첫 곡의 볼륨 레벨이 너무 크다. 중간중간 브라스 섹션이 들어간 부분에서는 악기 간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인상도 받게 된다.



음악사가 장유정의 기존 연구를 잘 알고 있는 이가 아니라면 여기 수록된 곡들의 어디가 재즈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터다. 가능하지만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반문, ‘그렇다면 재즈가 무엇인가에 당면할 것이다. 참고로 요아힘 베렌트(Joachim-Ernst Berendt)의 『재즈 북(The Jazz Book)』이 출간된 것이 1953년이다. 미국인들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재즈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재즈는 이 당시 장르나 스타일을 넘어서서 음악을 선택하고 수행하는 태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음악적으로 모든 새로운 수단을 검토하고 투신하는 열정의 보편적인 형태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인증받는 것이 아니라 업데이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장유정은 아마 이 곡들에서 역사가 되려는 의지로서의 재즈를 발견한 게 아닐까. 그 재즈는 고색창연한 흑백 필름이 아닌 천연색 시계(視界)였을 것이다.



[Track List]

01. 이태리의 정원

02. 정열의 산보

03. 리라꽃은 피건만

04. 희망의 블루스

05. 외로운 가로등

06. 외로운 가로등(Acoustic Ver.)

07. 추억의 탱고

08. 바다의 꿈

09. 다방의 푸른 꿈

10. 사막의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