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를 견디고 나니 "그래도 서울이 좋다"


201*년 9월 **일. 전쟁은 예고가 없었다. 전면전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적은 한국의 후방을 간헐적으로 공격했다. 나는 서해안을 통해 들어온 적의 개별 침투부대를 상대해야 하는 예비군 부대에 편성됐다.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 상황은 정규군이 아닌 예비군이 그 소탕작전을 맡는다. 말이 소탕작전이지만 이쪽이 전멸할 수도 있다. 이 곳으로 올 때만 해도 내가 일하던 도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TV는 비교적 전선 소식을 가감 없이 전달했고 점심 백반 식당은 리필을 거부하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그건 어찌 됐든 적을 막아내려는 처절한 몸부림 덕분이었다는 걸 알았다. 정훈 관련 기록병으로 부대에 배속됐지만 노트북을 쓰는 데 있어서도 등화관제(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 엄격했다. 파견 나온 지역지 기자들과 나는 같은 막사에 배치되었다. 물론 상황이 벌어지면 노트북 던지면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항시 실탄과 소총을 몸에 지녀야 했다. 지역지 기자는 늙수그레한 동대장에게 총이 자꾸 외장 하드의 잭을 쳐서 오류가 난다며 소총을 다른 데 거치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동대장은 '야비군' 훈련 때의 옆집아저씨가 아니었다. 다만 진지 외곽 경계 임무를 따로 맡을 필요가 없어 잠깐잠깐 쪽잠이나마 잘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적은 후방에서 제법 큰 움직임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 같지만 실제 상황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이미 선봉으로 차출됐던 예비군 병력이 큰 희생을 치른 덕이었다. 적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한낮에 둘러본 마을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아니 눈으로 보이는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거의 외형적인 윤곽은 멀쩡한 가운데 두세 군데 집의 지붕이나 벽이 날아가거나 뚫려 있는 모습, 간간이 보이는 혈흔 같은 것은 그 곳의 풍경을 지옥으로 보이게 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아니 지옥이 온전히 마을 안에 자리잡은 인상이랄까.


마을을 돌아보고온 날, 약속이나 한 듯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멎었다. 당분간 적 출현에 대한 예고도 없어서 막사는 이따금 들리는 경례소리만 빼면 극도로 조용했다. 구면인 듯한 기자들은 끼리끼리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내 옆 간이침대를 쓰는 지역일간지 기자는 나처럼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불 있어요?"


그는 운이 나빴다. 하필 불을 빌리려 말을 건 게 비흡연자인 나였다. 그에게 그보다 큰 적습이 없었던 것 같다. 한참 굳어 있던 그는 뜬금없이 명찰이 달려 있는 쪽의 윗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더 웃긴 건 나도 같은 위치에 명함 케이스를 넣어 두었다는 것.


내가 담배나 라이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명함에 적힌 음악매체명을 보고서도 상당히 놀랐다. 음악기자가 왜 이런 데서, 그런 의구심이 슬쩍 지나쳤지만 우리는 전쟁터에 있었다. 전쟁의 질량과 인력은 모든 의혹을 안정화시키는 힘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소지품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CD수납 백에서 음반 하나를 꺼내 노트북 플레이어에 삽입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볼륨을 살짝 올렸다. 


"오 년 전 다시 돌아온 도시 서울은 / 칙칙하고 우울한 내 맘은 /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

성탄절이 지나 벌니 일요일 밤의 / 그 거리, 테헤란로

청담동, 반듯한 비밀의 명품거리 / 홍대 앞에 가면 맥주 한 잔…"


풍부한 공간감의 코드웍 다음에 이어지는 피쳐폰 전화기 알람처럼 명료한 스타카토음으로 끊어지는 건반 멜로디, 그리고 전혀 꾸며내지 않은 풍요로움이 돋보이는 가사가 멋스럽게 물려 있는 곡이었다. 남자 이름 같았는데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보니 성숙미 있는 여자라 CD를 구입했다고 했다. 2014년 1월에 나왔던 이정표의 [특별한 독후감], 그 6번 트랙 "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린 서른 여섯 닭띠라는 기자는 그 옛날 보아(BoA)를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소싯적에 기타를 좀 만졌다는 그는 김정배 씨가 작곡한 "Milky Way"를 좋아했다며 몇 소절을 흥얼거렸다. 사실 뮤지션의 이름에 관한 호기심으로 산 CD였지만 북클릿에서 김정배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한참 감상에 빠졌었다는 얘길 했다. 무슨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취재부에서 미혼은 자신 뿐이라 파견됐다는 이야길 끼워넣었다.






사실 그는 이 곡보다 바로 다음에 김정배의 풍성한 기타 톤이 최은창의 베이스 톤과 시너지를 이루는 "Music is Sunshine of my life"를 더 좋아했다고 했다. 아니 "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는 가사가 싫었다고 했다. "2014년 초에 전셋값이 폭등했어요. 미아동 아파트 전세가 평당 1000만 원이 됐죠. 여동생 시집보내고 빚으로 사는 부모님은 시골로 갔어요. 말로는 귀농한다 그러지만 서울 토박이인 양반들이 뭘." 그래도 한편으로는 적 타깃이 되는 서울보다 시골이 안전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스스로 수습까지 했다.


""서울이"는 사실 여기 와서 생각났어요."

"왜요?"

"음악을 자세히 들어보니까, 그 왜 멘델스존 있잖습니까. 이름이 '축복(Felix)'인 남자. 그 양반 생각이 나더구먼요. 여자가 잘 살라믄 남자 이름을 지어야 한다더니 그 짝인가. 뭔가 되게 꾸밈없는 풍요? 그런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구로동 원룸 월세 사는 넘이 청담동 클럽에 6만 원짜리 연주하러 가서 주워섬기는 명품,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자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그런 풍요로움. 사실 그런 정서, 되려 여기 전쟁터에 오니까 막 갈증처럼 생각나더라고. 게다가 자세히 들어 봐요. 압구정 등지고 강남구청 쪽으로 가는 청담동 명품 거리나, 크리스마스 지나고 테헤란로나 다 조용하잖아요. 사실 거기도 조용하면 꽤 괜찮은 동네야. 건물들이 막 안아줄 것 같기도 하고. 회색이 그렇게 나쁜 색이 아니라니깐요." 물론 팬톤(PANTONE)은 2014년의 컬러를 회색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이 앨범이 발매됐을 떄의 일이다.


"그냥 이 음악 들으면, 이 작전임무만 종료되고 소집만 해제되면 내가 있던 **일보 인근 골목이 딱 이래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죽지만 않으면 '풍요'야, 내가 말하고도 어이없고 기가 막히지만 말이요. 사실 한기자 같은 양반도 이런 뮤지션만 있으면 진작 쪽박 찼을 걸? 다들 붕어에 복사기 이런 애들이 있어 주니까 뭔가 할 말이 생기는 거지." 쪽박은 진작에 차고 있었지만, 음악이 전해주는 풍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음악에 실린 그의 해괴한 달변도 함께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아니 설득력이라기보다 그건 사람의 의식을 끌고 들어가는 백지 위 선묘화 같은 종류의 '꾐'이었다.


나는 이미 그 때 그가 반쯤은 미쳐 있음을 알았다. 그는 문제의 CD를 내 가방에 넣어 두고는 탈영했고, 작전은 일 주일 후에 종료됐다. 그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경기도 **시는 상황이 정리되자 그가 속해 있던 **일보의 지원예산을 반으로 삭감했다. 그 매체는 상당한 수의 기자 인력을 감축했다. 어디에도 재건 특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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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때 그가 남겨 준 CD를 갖고 뮤지션 이정표를 만나기 위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의 테헤란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다. 포화를 견디게 해 준 음악에 대해 감사부터 해야 했다. 확실히 국지전이 쓸고 지나간 후 서울 전셋가는 좀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서울이 좋다. 아침에 나올 때 워크룸 프레스에서 나온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에서 '교본'을 화이트로 문대 지우고 '독후감'을 넣었다. 서른 일곱 삶에 잘 한 몇 가지 안 되는 일 중 하나를 했다.| 한명륜@evhyjm@gmail.com



사진제공: 미러볼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