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한계를 창의력으로 극복하려 했던 칩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DAW(Digital Audio Workstation)의 발전이 빅데이터와 조우한 2010년대, 우리의 자화상은 이제 창의력의 한계를 기술로 극복하려 하고 있다. 좋은 음악이 인기 있는 음악이 아니라 인기 있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 판단하는 오늘날 대중 사회의 성과 중심적 사고가 음악계를 풍요 속 빈곤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한다면, 기술적으로 어려웠기에 음악적으로 더 각고면려(刻苦勉勵)했던 작가 정신의 고전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보자. 음악가의 창의성이란, 아이러니하게도 궁지에 몰리고 절실할수록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정신이 궁지에 몰리지 않는다면).



1985~1994,  20세기 르네상스 시대오직 그 시대만의 산물 칩튠

 

시기적으로는 대략 1985년에서 1994년 사이에 해당한다. MTV의 본격적인 대중화와 더불어 새로운 전자음악의 실험과 파급의 중심에 서 있던 뉴웨이브,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설렘으로 생겨난 월드뮤직의 붐, <백투더퓨처> 시리즈부터 <라이온킹>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을 모두 아우르는 미래지향적 영화, 기술의 유한한 제약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극복한 비디오 게임 등……. 냉전 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1989)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1991) 직전과 직후를 살아가던 시절, '모든 인류가 살기 좋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갈망했던 예술가들은 마치 사명감에 가까운 담대한 이상향과 장인 정신으로 놀라운 수준의 대중 예술을 쏟아냈고 그 풍요로운 자양분은 실로 그들이 격동의 시기를 헤쳐 나가는 데 큰 문화적 밑바탕이 되었다. FM 신스의 장인, 일렉트로닉과 디스코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가 작곡한 서울 올림픽(1988) 주제곡 손에 손잡고(Hand in hand)”가 약 1,7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지금껏 세계로부터 올림픽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추앙 받는 것은, 인류의 평화를 위한 절실한 바람 속에서 그의 창의성이 눈부시게 빛났고 음악으로부터의 궁극적인 감동과 메시지가 이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하는 자양분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예술의 르네상스 시대가 칩튠 음악의 전성기와 실제적 운명을 함께 했다는 통찰은 우리가 칩튠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단순한 사실 이상의 깊은 뒷맛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그 시대의 소명처럼 초월적이었던 상상력의 미학을 칩튠을 들으며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시대 전반에 깔려 있던 이상향에 덧붙여, 비디오 게임과 칩튠의 발전을 산업의 성패를 걸고 필연적으로 이뤄내야 할 시대적 요구를 제공한 사건이 한 가지 더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아타리Atari 쇼크'.

 

 

아타리 쇼크가 불러 온 산업 존폐 위기, 3세대 게임의 서막

 

1977년 개발되어 전세계적으로 총 1,400만대가 팔릴 만큼 열기가 뜨거웠던 대표적 2세대 게임기 아타리 2600. 이후 미국 게임 회사 아타리는 1982년 한 해 동안 6천만 개의 게임 카트리지를 판매할 정도로 게임업계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으나 자만과 탐욕에 빠져 게임성을 간과한 돈 벌기 수단으로 게임을 내놓는 행태가 차츰 극에 치달았다. 이듬해, 가정용 '팩맨'의 조악한 완성도에 연이어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단 5주 만에 시장에 내놓은 게임 'E.T.'가 최악의 완성도를 드러내면서 사람들은 실망감에 더는 게임 카트리지를 구입하지 않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1983년 아타리는 3 5,600만 달러의 적자를 떠안은 채 불과 1년 뒤인 1984년 도산하기에 이른다. 아타리 쇼크를 경험한 사람들이 '가정용 게임은 오락실 게임에 비해 형편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1984년 북미와 유럽의 가정용 게임 콘솔 시장은 흡사 죽음과도 같은 암흑기를 거쳐 갔다.

 

아타리 쇼크로 불거진 가정용 게임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불신을 전화위복으로 바꾼 것은 조용히 내실을 다지고 있던 일본 게임 업체들이었다. 1983년 닌텐도Nintendo가 발매한 8비트 기반 게임 전용 컴퓨터 패미컴(NES: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은 아타리 2600을 그대로 벤치마킹하면서도 저가형, 보급형 이미지를 강조하여 가족 모두가 즐기는 '패밀리 컴퓨터'라는 제품의 이름으로 출발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창의력이 부족했던 닌텐도는 1985년 이전만 해도 세계 최초의 상업용 슈팅 게임인 스페이스 인베이더’(1978)를 개발한 타이토Taito, 80년대 오락실 슈팅의 전설 갤러그’(1982) 및 오늘날 슈팅의 실질적 원형인 제비우스’(1984)를 잇따라 개발한 남코Namco의 오락실 게임의 위상에 밀려 세간의 히트작을 가정용 소프트웨어로 특징 없이 모방하는 아류 게임 업체에 지나지 않았다. 아타리 쇼크를 계기로 게임 본연의 '게임성'을 목숨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닌텐도는 1985년 미야모토 시게루의 세계 최초 횡스크롤 액션 게임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를 만나 미국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3세대 게임기의 새 막을 열었다.



스토리텔링의 혁명 'Overworld' 테마 음악



패미트래커(FamiTracker)로 시퀀싱을 재현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메인 테마 “Overworld”


집 근처를 지나다니다 늘 마주치곤 했던 작은 맨홀 뚜껑. 그 맨홀을 열고 들어가면 어디로 통할까라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상상에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의 모티브는 탄생하였다. 그리고 미국 진출을 꿈꾸던 닌텐도가 뽀빠이의 판권을 사들이지 못했기에 그는 시금치를 버섯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미녀와 야수의 모티브에서 납치된 공주의 구출을 떠올렸다. 게임 중 숨겨진 덩굴을 타고 구름 위를 올라가 보너스 코인을 찾는 이벤트는 행여 재크와 콩나무의 영감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발상의 모방의 차원을 넘어 하나하나의 영감들을 독립된 자신의 세계로 창조하는 힘의 원천은 '세상을 통해 바라보는 나'가 아닌 '나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사고였다. (이것을 생산자들이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모방이 모방을 낳는 무더기 쏠림 현상 속에서 획일적, 의존적이고 수직적인 예술 문화가 연출된다.) 미야모토는 다행히 그 창조적 사고법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게임의 핵심 재미가 점프에 있다는 철학을 게임 곳곳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충실하게 녹여 냈다. 작곡가 곤도 고지는 그 영감을 고스란히 전달 받아서 그것을 예술적인 음악으로 창조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테마가 바로 위의 오버월드Overworld 음악이다.

 

지상의 스테이지에서 흐르는 Overworld 음악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념적'으로는 bpm 200에 달하는 4/4박자이지만 리스너는 들으면서 템포가 빠르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퍼커션의 구성으로 인해 '기능적'으로 박자(meter) 4박자(quadruple)이 아닌 2박자(duple) 형태를 띠고 있어, bpm 200 4/4박자가 아닌 bpm 100 2/2박자로 음악을 인지하게끔 해 놓았기 때문이다. 6/8박자의 블루스의 템포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빨라지면 3박자(triple meter)의 두 세트로 인지되어 기능적으로는 2/4박자로 표현되는 이치와 같은 맥락이다. (하모니에서도 개념적인 관점과 기능적인 관점은 별도로 존재한다. 별개의 관점들을 중의적으로 한데 활용하는 음악들은 수사적 표현이 다채로워져 예술미를 높일 수 있다.) 따라서 리스너는 전체적으로 bpm 100의 미드 템포로 친밀한 가운데 2박자(duple)의 경쾌한 호흡, 8분음표들의 스타카토에 당김음과 셋잇단음표가 어우러져 정중동의 설레는(mind-blowing) 인상을 받을 수가 있다.

 

구조적 개성에 덧붙여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음악적 연출은 루프 초반의 두 마디다. V9/V, V의 단 2가지 하모니인데 세컨더리 도미넌트(tonicization)로 시작하는 하모니의 파격도 물론 놀랍지만 그 위에 얹은 모티브 멜로디는 오직 1 3화음(tonic triad)의 구성 노트로만 구성되어 있다. 향후 멜로디가 1 3화음의 구성 음을 주요 셀cell(주제를 이루는 최소 단위로 음표 2~4개로 구성. 참고로 모티브는 2~3마디를 의미)로 삼을 것이라는 복선인 동시에 음악 전체의 주제를 앞에 함축해 놓은 것이다. 이 장치들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인 1 3화음 구성 노트들의 주제 표현을 독자적으로 기억될 만한(catchy) 튠으로 승화하는 데 일조했다. 여기서 '독자적 튠이 있다'는 뜻은 분위기에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적당한 접근이 아닌 음악 스스로도 순간의 흐름을 스토리텔링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위의 관점에서 ‘Overworld’ 테마는 스스로의 튠을 충분히 확립하고 있으므로 초반의 두 마디만 들어도 결코 얕지 않은 멋이 우려 나오고 있다. 그 두 마디를 의도적으로 루프의 초반에 배치하는 파격을 선보였던 곤도 고지는 게임 속 효과음보다도 들러리였던 게임 사운드 칩의 'BGM'을 본격적인 '음악'의 반열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슈퍼마리오와 그 음악의 독자적 세계에서 영감의 자양분을 받은 일본 게임 회사들은 한껏 고무되어 저마다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백 명의 범재보다 한 명의 천재'를 원하게 된 고무적 산업 환경은 이후 코나미 '메탈기어'의 창시자 코지마 히데오, 세가 '소닉'의 창시자 나카 유지 등을 낳았다.




Ricoh 사의 RP2A03



Ricoh 2A03 미학의 재발견, 21세기의 패미트래커(FamiTracker)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의 사운드는 패미컴에 호환되는 소프트웨어의 내장 사운드 칩에서 탄생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복사기 회사로 잘 알려진 리코Ricoh는 당시 닌텐도의 패미컴 콘솔 내에 Ricoh 2A03(위 사진)라는 8비트(개별 파형(waveform) 컨트롤 기준) 사운드 프로세서를 장착했는데 사운드는 동일하지만 NTSC 방식(60Hz TV: 정적인 해상도는 떨어지지만 움직임이 부드러움)을 상용하는 아시아와 북미에서는 2A03, PAL 방식(50Hz TV: 정적인 해상도는 상대적으로 좋지만 움직임이 덜 부드러움.)을 상용하는 호주권과 유럽에서는 2A07의 이름의 프로세서를 사용했다.

 

Ricoh 2A03(2A07)는 명실상부 패미컴(NES) 사운드의 표준 사운드 칩으로서 타 기종의 PSG AY-3-8910, 코나미 SCC 사운드 칩 등과 함께 80년대 말 3세대 게임기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며, 5채널의 가용 음색, 40KB 내의 가볍고 캐주얼하며 바삭하면서도 감칠맛을 내는 사운드 질감으로 3세대에서 실로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은 모델이라 볼 수 있다.



패미트래커의 기초 튜토리얼. 툴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http://famitracker.com/downloads.php



기존의 게임 사운드 칩은 소리의 정보가 코딩의 형태로 디지털화되어 담겼지만 오늘날에는 크게 트래커tracker와 플러그인plug-in 두 가지 형태로 시퀀싱이 가능해졌다. 트래커는 사운드 칩의 개별 에뮬레이터로서 키보드 자판으로 피치를 입력(마침 키보드 버튼의 배열이 건반의 맞물린 흑백 키 배열의 형태와 같다!)하는 방식을 띤다. 플러그인은 DAW에 연동하여 마스터 건반으로 설정 소스를 직접 입력하는 방식으로 트래커에 비해 좀 더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띤다. 다만 볼륨 컨트롤의 세부적인 설정, 오리지널 음색의 구현 측면에서 트래커는 해당 사운드 칩의 전용 에뮬레이터를 표방하여 나온 것이기에 수고롭지만 보다 전문적인 작업이 가능하다 하겠다.

 

패미트래커FamiTrackerRicoh 2A03의 에뮬레이터로서, 시중에 있는 프리웨어 중 가장 잘 알려진 트래커 중 하나다. 위의 튜토리얼은 기초라고 표시돼 있으나, 본질을 자세히 보면 이펙터가 없던 시절의 에코(300ms 이상의 롱 딜레이) 연출법과 노이즈의 볼륨 컨트롤 활용을 통한 퍼커션 표현 등 기술적 제약을 극복해 나가는 칩튠의 창의적 면모가 엿보인다. 이 칼럼을 읽고 8비트 칩튠 제작에 밤잠을 설칠 만큼 가슴이 뛰는 독자가 있다면 부디 위 비디오를 천천히 살펴보면서 창의적 정열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는 20년 전에만 태어났다면 슈퍼마리오를 능가하는 음악을 만드는 칩튠 음악가로 저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을 텐데 하는 상상을 진지하게 해 보곤 했다. 그러다 패미트래커를 써 보는 것을 시작으로 오케스트라만큼 칩튠을 연구하게 됐고 실제 영화음악에 접목해 사용한 기억이 있다(프로덕션의 감탄과 실망이 뒤섞인 오묘한 반응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순수 오케스트라로 작업해야 했지만).

 

기실 누군가에게 칩튠은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숨겨진 미학의 재발견이다. 현세의 혜택이 더 이상 없는 '유물'은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끼리만 공유가 가능한 법이다. 주변에 골동품과 고물을 열정을 다해 수집하는 독특한 미감의 소유자가 있다면, 그를 궁지에 몰아넣지 말자. 현재의 고물을 미래의 보물로 만들 미야모토 시게루와 같은 심미안을 지닌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잠재력을 깨우기에 선험적으로 가장 탁월한 시대와 국가적 환경이 있다지만, 세상의 탓이라 체념하기에는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실험들이 많이 남아 있다.| 윤규 surinmusi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