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출처: 네이버 무비



영화음악의 장르적 진화

 

영화음악은 스코어 작법상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 장르로 분류가 가능하다. 호러, 액션, 코미디, 로맨스, 드라마가 그것이다. 영화 연출 기법이 CG와 실사의 접점을 파악해 경계를 감쪽같이 드나들 수준에 이르고 영화음악의 라저 댄 라이프larger-than-life 사운드’(실제보다 웅장한 앰비언트ambient 뮤직)가 블록버스터 액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초현실적 영화에 적용됨에 따라, 현대에는 액션, 로맨스, 드라마 스코어링 스타일이 한데 융화되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어드벤처를 독립된 스코어 장르로도 분류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어드벤처 음악을 독자적 작법의 장르로 구축한 데는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공이 실로 지대하다. 그의 구조화된 작법은 영화음악 스코어링의 교본으로까지 쓰이고 있다). 영화의 장르적, 기술적 진화는 영화음악도 덩달아 진화케 한다.

 

브라이언 타일러Brian Tyler가 블록버스터 액션에서 자신의 장기인 드럼세트로 뮤지컬musical theatre 색채를 가미하고 스티븐 프라이스Steven Price가 마디 구분이 불분명한 우주적 프로그레시브를 영화음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하여 예술미를 선보였다면, 여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는 로맨틱 음악의 대가가 음악의 날을 한껏 세우고 자신의 스포트라이트를 기다리고 있다.

 

 

준비된 로맨틱 스코어 작곡가, 테오도르 샤피로

 

테오도르 샤피로Theodore Shapiro는 작편곡과 사운드 디자인의 특성만을 고려하였을 때 헐리우드의 로맨틱 장르에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기 더없이 매력적인 영화음악가다. 탄탄한 화성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여유 있는 음악적 어휘력vocabulary흔히 일본 음악가들의 섬세함을 방불케 하는편집적 기운이 느껴질 정도의 시퀀싱을 구사할 수 있는 헐리우드의 몇 안 되는 컬러풀한 영화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프로듀서들은 오래 전부터 그의 잠재성과 꾸준한 노력을 알아 보았고 실제 그의 필모그래피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애니메이션 장르의 색색의 영화로 채워졌다. 따라서 이번, 로맨스와 어드벤처 장르가 결합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통해 그가 미국 로컬을 넘어 보다 본격적으로 월드와이드 뮤지션으로 발돋움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 결코 우연이나 행운은 아니다. 향후 컴필레이션 스코어(영화 속 오리지널이 아닌 수록곡)의 비중을 줄이고 오리지널 스코어의 비중이 높은 영화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펼칠 수 있게 된다면 음악적으로 로맨틱 스코어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매우 큰 잠재력을 지닌 작곡가이기도 하다.



Track 3. "Time & Life"(Main Theme)



첫 번째, 그의 음악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음 허밍em humming'이다. 샤피로는 LA의 각종 영화음악 강연과 워크샵에 활발히 참여하여 자신의 작업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 '음 허밍'을 자신의 음성으로 직접 녹음하고 몽상가적 분위기의 영감을 주로 인도에서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미국, 인도, 나이지리아가 양적인 3대 영화 메카지만, 질적 창의성 측면에서의 3대 허브는 헐리우드의 미국, 벌리우드(Bollywood: Bombay Hollywood의 합성어)의 인도, 극소주의(minimalism)의 담백함을 창의적 시선으로 담아내는 이란(Iranian cinema)을 들 수 있겠다. 인도, 이란 영화음악의 예술미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에 다룰 예정이다). 그의 허밍은 그의 여러 영화의 사운드트랙에서 인트로 시퀀스와 메인 모티브의 파생 멜로디로 즐겨 사용되는데 이 영화에서도 위의 3번 트랙뿐 아니라 17, 18번 트랙의 우클렐레 사운드와 함께 허밍이 등장하기도 한다. 긴장과 집중을 이끌어내기 위한 스코어 초반의 악기 편성에서 보통 스트링의 여린 레가토와 서스펜디드suspended(심벌 2개를 살짝 어긋나게 맞대어 문질러 크레센도 효과를 내는) 심벌즈가 흔하게 사용되는데 허밍은 이런 단순한 패드 효과를 한 차원 끌어올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며 음악의 컬러에 한층 입체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호러 음악의 거장 버나드 허먼Bernard Hermann의 킬빌(Kill Bill) OST “Twisted Nerve”에서 패드 효과의 저역 스트링과 고역 우드윈드woodwinds 사이 음역에서 사람의 휘슬 멜로디가 얹어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두 번째, 고소하면서도 펀치감이 느껴지는(nutty, punchy) 퍼커션의 컬러. 사운드에도 미각적 표현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대답은, '대단히 그렇다'이다. 사운드 소스 자체의 질감이 상당 부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이후 믹싱의 EQ와 컴프레서의 사용을 통해 사운드의 미감을 내는 것이 통상적이다. 일례로 한스 짐머의 퍼커션은 육식성(meaty) 사운드의 대명사로 충분히 불릴 수 있다. 그것이 처음 파형의 어택을 듣는 순간에 가장 큰 자극을 느끼고 이후 그것이 빠르게 휘발되는 성향을 지녔다면, 샤피로가 시퀀싱하는 퍼커션의 컬러는 첫 어택이나 전체적인 자극보다는 릴리즈까지 계속 파형이 조근조근하게 연결되며 전하는 뒷맛에 미학이 있다(이것을 초식성(lightweight) 사운드라 부른다면 의미상 더 생산적일 것이다). 초식성 사운드의 미학은 미국 쪽보다는 일본 음악 스코어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정성과 창의성으로 만든 음악일수록 작곡가의 가치관과 철학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샤피로의 퍼커션 컬러는 미국 영화음악가들의 성향 가운데 이른바 비주류에 속해 있다. 그 소수가 휩쓸리거나 묻히지 않고 독창적 가치로써 제 몫을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성숙된 예술문화를 지닌 시선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세 번째, 오케스트라의 녹음보다 시퀀싱에 할애한 노력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지금 이 순간 조그만 방의 홈스튜디오에서 밤낮없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미래의 영화음악가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면 샤피로를 본보기 삼아 열심히 정진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그의 미디 오케스트라 시퀀싱은 명실상부 헐리우드의 최고 수준에 올라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그의 미디에 대한 꼼꼼한 집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만 더욱 큰 펀치감과 두께를 내기 위해 육식성 사운드의 구현에 매달리는 미국의 수많은 영화음악가와 또 이를 주로 선호하는 프로덕션 속에서, 그가 더욱 자유도가 높은 오리지널 스코어의 분량을 영화 속에서 할애 받는 것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Junip - "Far Away" (영화 중 컴필레이션 스코어)



영화 속 오리지널 스코어보다 더 쟁쟁했던 몽상가들의 컴필레이션 스코어

 

 호러, 블록버스터 액션(스릴러 포함), 어드벤처 및 코미디에서의 높은 오리지널 스코어 비중과는 달리 그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로맨스와 드라마 장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로맨틱 스코어 작곡가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과도 같은데, 자신의 존재감을 영화 속에서 오래 못 발휘한다는 것은 단점이지만 실질적으로 90분 이상 영화에 대한 스코어링 작업 시간을 6주에서 8주 부여 받는 타이트한 스케줄 속에서 자신의 작업 분량이 적은 것은 그만큼 작업 효율성과 집중 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오케스트라 녹음보다 디테일 작업의 손길이 더 많이 가는 미디 시퀀싱 비중이 높은 작곡가라면 사실 나쁘지 않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가서, 로맨스와 드라마 장르가 오리지널 스코어 비중이 적고 컴필레이션 스코어 비중이 높은 이유는 단순하게도, 극중 대화dialogues가 영화 속 곳곳에 많기 때문이다. 대화가 많을수록 지나치게 화려하고 육중한 음악 스코어music score는 오히려 몰입을 해친다. 그래서 액션씬이 많은 블록버스터 영화일수록 오리지널 스코어 작곡가의 영향력이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별도로 한 가지 흥미로운 비밀을 덧붙인다면, 메가폰을 잡은 디렉터가 남성인지 여성인지에 따라 오리지널 스코어의 비중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여성 감독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장르를 떠나 남성 감독에 비해 플롯(plot)을 세계관이나 사건의 스케일보다는 인물들의 대화로 풀어나가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월등히 극중 대화의 비중이 높고 화면 전환이 넓기보다는 타이트하기 때문에 오리지널 스코어가 치고 들어올 여력이 대체적으로 많지 않은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바 있는 주도형active 음악보다는 맞춤형(passive) 음악을 전적으로 선호하기에, 결과적으로 여성 디렉터의 영화나 혹은 로맨스, 드라마 장르의 영화에서라면 스코어 작곡가의 개성보다는 분위기의 맞춤이 더욱 중요해진다 하겠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는 로맨틱 요소가 어드벤처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으므로 오리지널 스코어의 러닝타임들이 매우 짤막하긴 하지만 곳곳에서 짧고 빈번히 등장하는 형국이다. 극중 눈엣가시 상사인 테드Ted와 상상 속의 사투를 벌이는 11번 트랙의 액션 오케스트라 & 클럽 댄스의 우스꽝스러운 퓨전이라든지, 상어를 피해 탈출하는 16번 트랙의 액션 음악까지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의 에너지가 높은 곳에 이르러 관객이 음악에 보다 본격적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는 샤피로의 오리지널 스코어 대신, 감독이자 직접 주연을 맡은 벤 스틸러Ben Stiller가 직접 골랐다는 밀도 높은 컴필레이션 스코어들이 더 비중 있게 쏟아진다. 기실 이 영화는 '히피'의 가까운 친구인 '몽상가'들의 바이블로 불릴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생생한 철학과 이미지, 컬러 및 세상의 일반적 시선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상처를 통찰력 높은 선곡으로 일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건 벤 스틸러 자신이 몽상가이기에 가능했던 결과일 것이다.)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전설적 프로그레시브 락 넘버 “Space Oddity”(이 곡은 극중 플롯과 연결되어 여주인공인 쉐릴Cheryl이 직접 이 곡을 부르며 소스 뮤직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스웨덴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포크 싱어송라이터 호세 곤잘레스Jose Gonzalez의 내러티브 음악 “Stay Alive”, 그리고 위에서 소개된, 호세 곤잘레스가 이끄는 3인조 밴드 쥬닙Junip의 빈티지한 예술미가 유기적으로 돋보이는 “Far Away” 등은 월터의 세계관을 표현하기에 참으로 안성맞춤이다. 테오도르 샤피로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은 측면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로맨틱 스코어의 타고난 생리를 반영할 때 짤막한 스팟들의 호흡 안에서 최대한의 컬러를 그려냈으므로 OST의 독립적 완성도보다는 여러 가지 튠의 제 몫을 다해냈다는 표현으로 만족해야 할 듯 하다. 그의 인상적인 색깔이 더 진하게 발현될 수 있는 다음 필모그래피를 기대한다.| 윤규 surinmusi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