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짐머레스크(Zimmeresque)'라 불리던, 단순한 화성을 직선적(linear)으로 두드려대는 육중한 중저역 스트링의 16비트 스피카토(spiccato)와 날선 펀치감의 퍼커션 루프는 2000년대 영화음악의 가장 거대한 씬(scene)이 되었고 이제 세계의 수많은 영화음악가들이 그가 정착시킨 사운드 디자인을 자신의 음악에 적용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재의 현상이 보이는 그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아주 먼 미래로 이어지는 1차원의 스칼라(scalar), 즉 시간 수직선상에서 본다면 현재는 때마침 그 순간을 지나는 일종의 스냅샷인 셈이다. 양끝의 시간을 동시에 바라본다는 건 현재를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심미안이 될 것이다. 2010년대 영화음악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혁신적 스코어로 일찍이 두 가지 화두를 꺼낸 바 있다. 하나는 지난 칼럼에서 다룬 <그래비티(Gravity)>의 프로그레시브, 다른 하나는 이번에 이야기할 <트론 레거시(Tron Legacy)>의 하이브리드(hybrid) 클럽 일렉트로닉이다.



아케이드(arcade)<트론(1982)>에서 시뮬레이션(simulator)<트론(2010)>으로

 

먼저 클럽 일렉트로닉이 오리지널 스코어(original score)로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에 관해, 독창적 세계관을 품은 영화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멀지만 가까운 과거, 1982년 영화 트론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디오 게임의 가장 큰 미학이 어디에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는가? 아마도, 게임에서 죽거나 실패해도 언제고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플레이하는 과정의 흥미,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때로 멋진 죽음(epic death)을 예술미로 느끼기 위해 심지어 일부러 죽을 수도, 어떤 무모한 모험도 불사할 수 있다. 목숨이 하나 줄었다 해도 그것은 단지 감당해야 할 일종의 '불이익'이다. 궁극적인 리스크는 실로, 게임 밖 사용자(user)가 아닌 프로그래밍된 게임 속 플레이어(player)가 감당해야 할 그들의 하찮은 목숨 값이다.

 그런데 사용자가 그 '하찮은' 플레이어의 처지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비디오 게임 속에서 뛰어다녀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곳은 꿈보다는 생존 본능만 남은 디스토피아(distopia). 소멸시키지 못하면 자기가 소멸되는 잔혹한 게임의 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 경기 비장한 각오로 임할 수 밖에 없다.

 

 'Space Paranoids'라는 게임의 심장부를 담당하는, 점점 영리해져 되려 위험해져 가는 인공 지능 '마스터 컨트롤(master control)'을 인간이 꺼내려(즉 제거하려) 하자 그가 반대로 인간을 게임 속 세계로 데리고 들어왔다. (흥미롭게도, 1986년 출시된 알카노이드(Alkanoid) 비디오 게임의 보스 스테이지들은 마스터 컨트롤의 형상과 그를 격파하기 위해 플레이어 '트론'이 원반을 던지고 돌려 받는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다.) 사용자를 향한 플레이어의 시선과 반란을 다룬 이 영화의 세계관은 이후 현실과 가상 세계의 접점을 제시한 이른바 디지털 관문(digital frontier)으로서 매트릭스, 아바타 등의 아이디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이른다. 디지털 세계를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작곡가 웬디 카를로스(Wendy Carlos)가 당시 활용했던 무그(moog) 계열의 신서사이저(synthesizer) 오케스트라가 같은 연도 반젤리스(Vangelis)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 스코어(*** 차후에 다룰 예정이다.)와 더불어 80년대 영화음악의 뉴웨이브(new wave) 패러다임을 정착시킨 점도 혁혁하다.

 

1982년 트론이 비디오 게임 속 플레이어 트론과 사용자 플린(Flynn)의 호쾌한 영웅담에 비중을 둔 아케이드(arcade) 성향의 영화였다면, 28년 뒤 탄생된 트론의 후속작(리메이크가 아니다.)은 현실화된 가상 세계의 실체적 스케일을 강조한 시뮬레이션(simulator) 성격의 영화다. 그것은 일종의 페이소스(pathos: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극적 표현 방식)로 관객에게 작용한다. , 원작에서 단연 돋보인 라이트 사이클(light cycle), 원반 던지기와 같은 동일한 소재를 표현할 때에도 아케이드가 아닌 시뮬레이션의 관점으로 영화를 대하면, 관객은 주인공이 언제 어디서라도 죽을 수 있다는 현실적 긴장 때문에 영화와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면서 감상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다룬 '잡스(Jobs)'의 관조적 묘사와 사뭇 대비되는 특질이 아닐 수 없다.





"Derezzed"(영화 속의 한 장면)



영화 속 뮤직비디오로 보여도 OK,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소스 뮤직(source music) 'Derezzed'

 

결국 전작보다 한층 관객과의 거리가 밀착된 시뮬레이션의 영화 컬러 속에서 새로운 <트론(Tron Legacy)>, 보다 꽉 조이고(tight) 현실적 긴장감이 살아 있는 미래지향적 튠을 위해 다프트 펑크를 스코어 작곡가로 택했다. 두께 있고 펀치감 강한 더티 신스(dirty synth)를 루핑(looping)하는 데 특화된 그의 성향은 사운드적으로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대가 큰 조합이다. 다만 스코어 작곡가가 아닌 다프트 펑크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무엇이며, 영화에서는 과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첫 번째 이슈는 루핑에 의한 규칙적인 비트. <Now You See Me 마술사기단> 칼럼에서-다양한 비디오 싱크(sync)와 장면의 현장감을 위해 작곡가가 템포와 박자표의 변화를 비일비재하게 써야 할 필요가 있고 그를 위해 드럼 세트보다는 해체된 타악기를 선호하게 된다는 영화음악의 리듬의 특질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다프트 펑크 스타일의 작법의 초석은 드럼 루프(drum loop). 반복적인 비트의 패턴은 중독성을 띨 수 있지만 자칫하면 매너리즘을 불러 일으켜 영화의 현장감을 크게 떨어뜨린다. 장면 흐름의 현장감이 약화되고 대신 영상미가 강조될 경우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뮤직비디오가 되어 버린다. 음악가보다 영화 프로덕션 측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우려한 일부 프로듀서, 디렉터들은 힘들게 촬영한 장면이 음악을 위한 뮤직비디오로 작용하느니 차라리 해당 장면에 음악을 넣지 않는 강수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영상의 현장감과 음악을 동시에 살리기 위한 장치가 존재한다. 뮤직비디오로 비춰질 우려가 있는(하지만 꼭 쓰고 싶을 만큼 근사한) 음악을 영화 밖이 아닌 속에서 실제 연주하는 것처럼 연출하고 배우들도 그 튠에 반응하도록 연기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 개입되어 상호 작용(interaction)을 불러 일으키는 이 음악적 장치를 소스 뮤직(source music)이라 일컫는다. 이를 테면 차 안의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와서 배우가 그것을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장면, 극중 음악에 맞춰 배우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그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의 원반 던지기 경기장에서 프로그래밍된 관중들이 박자에 맞는 추임새(response)'disk war' 또는 '린즐러(Rinzler)'라 계속 외치는 장면의 음악은 극 안의 음악이 아니므로 엄밀히 소스 뮤직은 아니다. 하지만 아주 기발한 기획이다.) 'Derezzed'가 흐르는 위의 비디오 장면(footage)은 트론 레거시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와 더불어 영화적 연출과 음악적 연출이 서로 극적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하이라이트 씬으로, 음악을 클럽에서 직접 플레이했다는 현실적 스토리의 개연성이 루프성 비트가 지닌 부족한 현장감을 보완하는 결정적 기능을 하고 있다. '근사한 음악 하나 틀어 줄 테니 마음 놓고 뮤직비디오처럼 즐겨라' 하는 일종의 역발상이다. 미학적 액션 씬의 예술미가 음악의 들러리로 비춰지길 원치 않는 프로듀서와 디렉터의 일반적 성향이 때로 역으로 전면에서 발휘될 때, 음악과 영화는 서로의 시너지로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다프트 펑크를 후방 지원사격해 준 짐머의 '리모트 컨트롤(Remote Control)'

 

두 번째 이슈,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의 약점이다. 클럽 일렉트로닉이 전면에 나서고 오케스트라가 뒷받침해주는 하이브리드 스코어를 계획한 프로덕션 측과 달리 다프트 펑크로선 오케스트라 편성과 보이싱, 실연, 녹음, 에디팅, 시퀀싱 등의 경험이 부족했기에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다. 정식 크레딧(credits)에 등재되지는 않았으나 이 사운드트랙의 숨은 조력자는 한스 짐머다. (2010년대의 영화음악 패러다임을 제시한 스코어의 숨은 조력자가 2000년대 패러다임의 창시자 한스 짐머라는 것은 꽤 인상적이다.) 다프트 펑크의 클럽 일렉트로닉 펀치감을 십분 활용하되, 이 사운드트랙은 오케스트레이션을 한스 짐머 예하의 사단 '리모트 컨트롤(Remote Control)' 스튜디오에서 존 파월(John Powell), 해리 그렉슨 윌리엄스(Harry Gregson Williams) 등이 편성하였으며 스코어 믹스까지 최종적으로 이곳에서 완료하였다. 이 영향으로, 짐머식 오케스트라 뿐 아니라 2번 트랙 'The Grid' 초반에는 함께 작업한 존 파월 특유의 음울한 딜레이가 담긴 리드믹 신스(rhythmic synth) 사운드 디자인이 엿보이기도 하며, 7번 트랙 'Rinzler' 초반에는 해리 그렉슨 윌리엄스 특유의 콰이어 패드와 어두운 오실레이터(oscillator) 사운드가 살짝 들리기도 한다. 중반부터 나오는 16비트 신스 아르페지에이터(arpeggiator) 루프의 피치 셀(cell: 모티브를 이루는 최소 단위로 3~5개 노트)의 원형은 심지어 본질적으로 블레이드 러너의 반젤리스가 사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Track 21 "Tron Legacy"(End Titles)


빅데이터 미디(midi)의 기술력 발전, 2010년대 하이브리드 튠의 시대 개막

 

그렇다면 한스 짐머 사단의 적극적 조력과 개입으로 다프트 펑크만의 음악적 정체성이 100% 순수하게 그려지지 못하였음에도 이 사운드트랙은 왜 2010년대 패러다임의 한 축을 구성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그 단서는 생각보다 단순한 곳에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영화음악의 흐름을 주도해 왔던 거대한 공통 분모가 다름 아닌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이다. '영화음악 = 오케스트라 음악'이라는 인식이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영화음악 산업의 현장에서 다른 대안이라 여겨지던 팝이나 락 튠도 현실적으로는 컴필레이션 스코어(compilation score: 기존에 만들어진 음악을 컬러와 톤이 맞는 영화 속에 삽입한 배경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오리지널 스코어(original score: 영화의 실시간 전개와 이미지, 철학을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하는 배경음악)를 위한 작법과 악기가 실제로 오케스트라만한 '표준'을 효과적으로 능가할 방법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1982년작 트론(Tron)에서 작곡가 웬디 카를로스가 신서사이저로 오케스트라의 작법을 표현하는 창의성을 선보였다면, 2010년대의 트론(Tron Legacy)에서 다프트 펑크는 그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클럽 일렉트로닉의 튠을 작품의 오리지널 스코어 영역으로까지 적극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작법의 프로토타입(prototype)을 제시한 셈이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루핑 중심의 클럽 일렉트로닉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는 살리되 짐머레스크의 선형적인 오케스트라가 가미된 하이브리드 형태로서, 향후 미래지향적 영화뿐 아니라 어드벤처 및 드라마 장르에서 일렉트로닉 중심의 튠이 성공적으로 스코어링될 수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2011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가 스코어링한 <한나(Hanna)>에서 그 징표는 이어진다).


더 나아가 이것은, 빅데이터의 발전으로 사운드 라이브러리 용량의 상한선이 사라져 가는 미디(midi)를 통해 프로그래밍되는 양질의 소스가 미래 영화음악에서 차지할 경쟁력이 전통 오케스트라의 악기와 작법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본격적인 신호탄이다. 영화 속에서 플린이 꿈꾼 인간과 디지털의 대통합은 한 세계의 폭발로 장엄한 최후를 장식했지만, 클럽 일렉트로닉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음악과 전통 오케스트라의 하이브리드는 이제 본격적으로 쏟아질 2010년대 영화음악 패러다임의 열쇠를 쥐고 있는 가장 유망한 실험 중 하나다.윤규 surinmusi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