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EBS 홈페이지>
공기업 경영악화 ‘막무가내 개선책’ 유탄…음악인들의 전략은
EBS의 공연중심 음악 전문 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이 내년부터 축소운영된다. 주 5일 진행되던 공연을 2회로 줄이라는 지시가 ‘하달’된 것. 언론노조 측은 EBS 교재 유통을 담당하는 총판과의 커넥션에서 생긴 빈 틈을 엉뚱한 프로그램을 희생양 삼아 해결하려 하고 있다는 요지의 성명을 냈다. 10년이라는 시간의 상징성과 더불어 플랫폼 이상의 상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씬의 한숨소리는 크다. SNS를 중심으로는 벌써 축소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최근 주춤했던 <헬로루키>, 2013년 반전 계기 보였는데…
사실 EBS <스페이스, 공감>의 제작진에 대한 압박은 있어 왔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러 다른 요구와 이해관계가 작용한 바이겠지만, 국정감사 때마다 관련 소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EBS의 협의(狹義)적 교육업무 외 사업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특히 EBS 국제 드라마 페스티벌(EIDF)처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콘텐츠에 대해서도 ‘그런 걸 왜 하고 있냐’는 식이다. <스페이스, 공감>에 대한 압박 역시 다른 방식을 생각하기 어렵다.
최근 1, 2년 사이 프로그램의 인기가 그 이전에 비해 조금 약했던 건 사실이다. 특히 <헬로루키>의 흥행부진은 다소 아쉬웠다. 그러나 이는 선발되는 뮤지션들의 음악적 퀄리티―이런 걸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실례―나 심사의 엄정성이 부진한 결과라기보다는 외부 변수가 너무 컸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CJ튠업>이라든가 <K루키즈> 등 비슷한 신인선발 프로그램의 영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터다. 물론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제작예산이 다변화하는 요구들을 수용하기에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섭외∙진행과 홍보를 맡은 A&A측과 기획위원들의 자원봉사에 가까운 노고를 통해 새로운 음악적 에너지를 가진 뮤지션들이 끊임없이 발굴됐다.
올해 <스페이스, 공감> 신인발굴 프로젝트 <헬로루키> 2013결선에서 대상을 차지한 락큰롤 라디오.
특히 2013년의 <헬로루키>는 어떤 전기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 무엇보다 음악인들의 개성을 무기로 대중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음을 확인한 기회였다. 대상을 받은 락큰롤라디오(Rock N’ Roll Radio), 아시안 체어샷(Asian Chair Shot)은 모두 씬과 해외 관계자들의 주목을 한데 받은 팀이었다. 특히 아시안 체어샷은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기타리스트 제프 슈로더(Jeff Schroeder)가 프로듀싱을 맡았을 정도다. 조금 앞선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 프로그램이 성공한 모델로 해외에 포맷 수출을 할 수 있다면 그 계기가 2013년의 <헬로루키>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설마가 현실로…무엇을 두려워하든 그 이상 보여주는 현정부의 공기업 관련 문제 해결방식
‘문화 콘텐츠에 대한 무지’라는 논의조차 다소 낭만적인 수사가 될까 일단 제쳐 놓고자 한다. 사실 이번 조치를 내린 EBS 경영진도 모르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스페이스, 공감>이 10년 이상 존속해 왔다는 것은 그만큼 방송 자체가 브랜드로서의 저력과 가치, 곧 향후 어떤 전기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임을 말이다.
그런데 지금 향후가 아니라 당장이 급하게 생긴 모양새다. 24일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주관한 공공기관 정상화 워크숍은, 말이 워크숍이었지 거의 영업사원 개인면담에 다름아니었다. “아까운 자산부터 팔아라”, “현실적인 방안을 갖고 오라, 자신 없는 CEO는 사임하든지 내가 해임하겠다”는 추궁에 공공기관장들은 저마다 속을 좀 구겼을 터다.
200%. 이 날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주문한 것은 공공기관 및 공기업 CEO들에게 주문한 부채비율 목표치다. 그런데 EBS는 사실 이 문제에 그리 구애될 부분이 없어 보인다. EBS 홈페이지에 지난 12일 공시된 2012년도 제13당기 현재 재무상태표를 보면 자본총계(약1092억)에 대한 부채총계(약620억)의 비율은 60%가 채 안된다.
그런데 어찌 EBS는 분위기의 희생양이 된 걸까. 아니, 정부는 공공기관 및 공기업 부채에 이런 거국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걸까. 이는 유감스럽게도, 갑작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정부가 2013년 내내 고민해 온 현안 중 한 가지가 공기업 부채를 공공부문에 넣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였다. 아직 전 세계적이지만 한지만 OECD 가입국은들은 점점 국가 신인도 향상을 위해 공공부문 부채에 공기업의 부채도 포함시켜 투명성을 높이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높다.
한국정부로서는 공기업 부채를 산입하지 않으면 투명성 면에서, 산입하게 되면 재정 건전성 면에서 문제가 생기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여러 가지 문제로 국제 경제활동에서 실질적인 평가절하를 받고 있는 시점에서 묘안이 없는 상태다. 사실 정부 관계자들도 EBS가 ‘도매금’ 취급을 받고 있는 걸 모르진 않을 터다. 그러나 이런 처지를 챙겨 줄 여력이 없다. KBS 수신료 인상에 EBS를 물고 들어가는 ‘꼼수’를 부리는 것도 이런 복잡한 요인이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사안이 이 정도니 <스페이스, 공감>이 안중에 있었으랴.
<헬로루키> 결선에서 아쉬움을 삼켰지만 세계적 뮤지션과 앨범 작업을 성공리에 끝낸 아시안 체어샷. 사진은 11월 16일 황보령 스맥소프트와의 <공간-합> 공연.
씬의 연대, 복수 트랙 전략 강구해야…씬의 구성원들, 자신에게 가장 아픈 질문 필요
사실 한국 대중음악, 특히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디’ 씬은 어떤 행동을 위한 조직적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역사가 영화계나 미술계만큼 깊지 않다. 평론가나 학자, 드물게는 의식 있는 행정가들이 단체를 만들고 연대를 도모했지만 기대한만큼의 효과를 볼 순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자립음악생산조합, 예술인 소셜 유니온 등의 움직임, 그리고 사회 현안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많은 뮤지션들의 SNS활동 등으로 인해 적어도 어떤 문제에 대한 의식을 공유하는 것까지는 가능해 보인다. ‘나는 먹고 살만하니까 나는 빼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만 해도 큰 가능성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뮤지션들은 일단 저마다 톤의 차이는 있지만 <스페이스, 공감>의 축소 운영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는 중이다. 특히 공중파 매체나, 씬에서도 눈에 잘 띄는 무대 기회를 얻기 힘든 실험적 성향의 뮤지션들은 현업의 문제이다. 이들의 경우 2013년 작업 결과물을 내고 평단과 마니아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시작한 터라 피부에 닿는 일일 터이다. 뮤지션의 EBS의 이런 독단적 결정에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다소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반대로 <스페이스, 공감>을 위해 뮤지션이 연대해 공연을 진행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어떻게 보면 씬 전반에 긍정적인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소 달콤한 면들로부터―에디터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달콤한 목소리에 취할 것 같아서―거리를 두고 보면 뮤지션을 포함한 산업종사자와 팬 등으로 이루어진 씬의 구성원들이 맞닥뜨려야 할 자극적인 질문들이 몇 가지가 있다.
EBS <스페이스, 공감>은, 엄밀하게 그간 행해오던 무료공연의 횟수는 줄었지만 폐지된 것은 아니다. 살아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그 다음이 생길 것이라는 다소 드라마적 감상을 가미하자면, 여기서 빠진 3일이라는 시간을 갖고서, 씬은 제작진과 어떤 식으로 교감하며 외연을 확장할 것인가? 즉 물리적으로 줄어든 기회를 어떤 공간과 방법의 선택으로 살려낼 것인가?
좀 더 구체적이며 확장된 물음도 던질 수 있다. 홍대를 비롯 외부의 공연시설에서의 활동을 공중파 EBS만큼 체계적인 타임라인과 플랜을 갖고 운용할 수 있는가? 그런 주체는 존재하는가?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를 EBS에 대한 씬의 물리적 ‘지분’으로 산정하고 추후에 어떤 방식이든지의 ‘복권’을 요구할 수단으로 쓸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뮤지션들에게 아픈 질문. 만약 EBS가 이 <스페이스, 공감>이라는 방송의 플랫폼을 일부 종편채널에 매각할 경우 출연할 의사가 있는가? 이는 정치적 견해 차이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실제 뮤지션들이라고 해서 모두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반대하지는 않으며 그래야 될 의무도 없다. 다만 엄밀히 따져야 할 것은 이 프로그램이 내용과 형식이 따로 떨어졌을 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 즉 EBS의 <스페이스, 공감>이었기에 그 자체로 ‘대안적’인 문화의 엠블럼 역할도 수행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EBS의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광고가 붙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그러므로 <헬로루키>에 대한 광고압박은 사실상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다.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야 하는 기업이라면 그 ‘깨끗함’, ‘지속가능성’ 등이 매력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호오(好惡)가 담긴 몇몇 채널,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그 기표만을 탈탈 소비해 버리고 필요가 없으면 버릴 게 자명해 보이는 또 다른 채널에 이 프로그램이 매각됐을 때, 뮤지션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작게는 개인의 행복추구, 멀리는 씬 자체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비슷하고도 어쩌면 다를 수도 있는 가치를 선택하는 문제다. 가벼운 대답을 해서도 안 되고, 또 어떤 대답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에필로그: 박근혜 대통령님, 공연중심 음악씬보다 더한 청년, 여성, 내수 서비스 일자리 보셨나요
그 외에 복잡한 질문은 더 있다. 방송 프로그램에 있어 내부 담당자와 외주제작자가 이룰 수 있는 긍정적인 합의 선례처럼 보이는 관계가 이러한 시련에도 꾸준히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이는 다른 분야의 외주제작 관행에 어떤 시사점을 제시할 것인지 등.
박근혜 대통령은 연말 국정연설을 통해 2014년도 성장목표를 3.9%로 잡았다. 국제통화기금(IMF)가 제시한 성장안 3.6%보다 0.3%가 높다. 이를 위한 키워드는 내수, 서비스 산업, 청년, 여성 중심 일자리 45만 개 늘리기였다. 사실 공연중심 음악 씬이야말로 내수 서비스업이자, 청년과 여성 중심 일자리다. 45만 개가 아니라 4500개가 목표라도 괜찮으니 있는 일자리나 걷어차지 않기를 연말에 간절히 기원한다.| 한명륜 evhyj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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